“통산 4득점, 그래도 농구는 제 운명이에요”

김종수 2023. 9. 5.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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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85)] ‘농구의 연인’ 김지수

 

“농구요? 세상에서 제가 가장 좋아했던 대상이죠.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가끔 농구를 안했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농구와 함께 하고 싶어요. 농구만큼 저를 행복하게 만든 존재는 없었거든요”

 

전 신한은행 에스버드, 신세계 쿨캣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했던 김지수(33‧174cm)는 농구 얘기가 나오면 환한 미소부터 짓는다. 그만큼 자신에게 소중하고 즐거운 존재다는 의미다. 기자가 임의로 그녀의 이름 앞에 ‘농구의 연인’이라는 말을 끼워넣은 이유다. 인터뷰 내내 농구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마치 오랫동안 사랑해온 연인을 얘기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만보면 그녀가 농구선수로서 꽃밭만 걸어온 듯 하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때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해 가장 중요한 시기를 통째로 날렸고, 프로 생활도 당시 최강팀 신한은행(전체 5순위 지명)에서 했던 관계로 변변한 출장시간 조차 잡기 힘들었다. 거기에 더해 무릎에 이어 고질적인 허리부상까지 겹치며 단 한번도 건강한 몸으로 코트에 나서지 못했다.


목표로 삼았던 선배들의 뒤를 잇기는 커녕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밀리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 성적 또한 초라하다. 통산 8경기에 나서 총 17분 24초를 뛰며 4득점, 3어시스트, 1스틸을 기록했다. 평균이 아닌 총합계이다. 신한은행에서 1시즌 1경기, 신세계에서 2시즌 동안 7경기를 뛴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수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행복했다고 회상한다.


“부상이 없었다면 좀더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해요. 하지만 선수에게는 그 부상 조차 스토리의 일부가 아닐까 싶어요. 견디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더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치거나 못한 것은 농구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농구는 단지 판을 깔아준 것 뿐이고 저는 그 위를 열심히 달렸다고 자평합니다. 코트에 나섰던 시간이 너무 짧았던지라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제 스스로는 저를 칭찬해주려고요. 수고했어. 지수야”
 


“은퇴후 이것저것 다양한 일을 해보고 있습니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구단 매니저, 헬스 트레이너, 요가및 필라테스 강사 등으로 있다가 지금은 재활센터 쪽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한남동에 있는데 치료 쪽에 비중을 두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고주파 기계로 일차적으로 치료를 하고 이후 손으로 매뉴얼대로 마사지를 하는 방식이 기본 코스에요. 마사지라고 하니까 보통 생각하시는 것을 떠올리실 수도 있겠지만 치료와 재활을 위한 것인 만큼 조금 달라요. 일단 많이 아프실거에요. 시원하자고 하는게 아닌 치료가 목적이니까요. 더불어 필요하다면 운동도 시켜드리고요. 이것저것 복합적인 개념이에요. 입소문이 나서 그런지 어디어디 회사 회장님이라던지 대표팀들도 자주 찾아주세요. 더불어 연예인분들도 단골이 많아요.

​​​​Q.오~ 연예인들도 많이 와요?
네, 가수, 영화배우 등 이름만대면 알만한 분들도 종종뵈요. 처음에는 ‘어, 연예인이다?’고 신기한 마음도 살짝 들었지만 계속보니까 지금은 일반 손님들과 별반 차이가 없게 느껴져요. 그냥 예약하고 치료받으러 오셨나보다 하고 제 하는 일에만 집중할 뿐이죠. 저는 원래 선수때부터 연예인 이런 분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어요. 이벤트로 경기장에 와서 공연같은 것 해도 별반 주의깊게보고 그러지는 않았거든요.

​​​​Q.그럼 농구 외에 어떤 것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그러게요. 저도 생각해보니 제가 무엇에 흥미가 있을까 싶네요. 텔레비전도 원래 잘 안봤고 남들이 요새 누가 잘 나간다는 등 이런저런 가십거리를 얘기해도 도통 시선이 안가더라고요. 운동과 일외에는 진짜 관심있는게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일적으로 필요하다싶으면 또 나름 깊이 파고들어요. 알아야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으니까요. 제가 하는 일에 있어서 책임감이 과하게 많은 편이에요. 그러다보니 다른 것에 집중할 여력이 없지않나 싶기도 해요.


​​​​Q.카카오톡 프로필을 보니까 남편과 자녀분들이 있더라고요. 생각해보니 주부신데 일을 하면서 다른 부분에 관심을 보일 시간 자체가 없을 듯 싶네요.
잉? 아니에요. 저 아직 미혼이에요. 남편으로 보이는 분은 남자친구고요. 아이들은 자녀가 아니라 조카들이에요. 너무 다정하게 사진을 찍었고 프로필에도 등장하니까 자녀라고 오해를 하신 듯 하네요. 남자친구하고 잘맞는게 남자친구도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지금도 꾸준히 동아리 등에서 농구를 즐길 정도로 농구를 좋아해요. 관심사도 비슷하고 그러다보니 농구에 대한 저의 사랑도 이해해주고 대화도 잘 통하는 편이죠. 함께 농구도 하고 만나면 즐거워요. 선수시절에는 잘해야된다는 생각에 농구가 좋으면서도 힘들고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거든요. 순수하게 즐기는 지금이 농구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지는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Q.경력중에서 요가 강사가 눈에 띄네요. 요가는 언제 배운거에요?
개인적인 일로 힘든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 요가를 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심신이 편안해지는 느낌? 그래서 그때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렇게 요가의 세계에 입문했어요. 요가, 필라테스 강사일은 현재 직업에 종사하기 전까지 5년 정도 했던 것 같아요. 여기서 일한지 반년 가량 되었으니까 최근까지 계속했다고 보는게 맞겠네요. 강사 일을 하다보니 낮시간이 많이 비더라고요. 오전반 오후 야간반 그렇게 있었는데 빈시간대에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농구를 가르치는 일을 했죠. 제 또래에 비해서 적지않은 수입도 올렸고 그로인해 안정적이기는 했지만 발전하지않고 도태되는 느낌? 성격상 변화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지않았나 싶어요. 무엇인가 새롭고 더 비전있는 일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오해는 하지마세요. 무슨 일이 더 낫다 그런 개념은 절대 아니에요. 지극히 개인적인 적성과 성향차이라고 보면 맞을 듯 싶어요.

Q.남자친구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동호회 농구 그런 곳을 가면 여자가 농구를 한다는 자체를 신기해하고 좋아해주시는 남자분들이 많으세요. 더욱이 선수 출신이라고 하니까 더 눈에 띄어서 그런지 친해지려고 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었어요. 남자친구같은 경우 사실 안지는 10년 정도되요. 그때도 동아리 농구를 다녔는데 거기서 처음 얼굴을 봤죠. 프로생활을 하면서도 휴가때 동아리 농구를 즐겼죠, 저보다 한 살 어린데 그때부터 좋아한다고 계속 표현을 했어요. 하지만 연하이기도하고 남자도 느껴지지는 않더라고요, 어쨌든 연락은 끊어지지않고 간혹 연락 정도는 하고 지냈어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오랜만에 만났는데 뭔가 좀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제가 먼저 대시를 했어요. 이상하죠. 외모도, 하는 일도 그전하고 딱히 달라진게 없는데 갑자기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호감도가 급상승했다는게 정말 신기해요. 그날 농구를 하려고 갔었거든요. 몇 년만에 얼굴을 봤어요. 그런데 예전보다 훨씬 남자다운 느낌도 들고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네요. 아마도 인연이 되려고 그랬나보다 생각하고 있어요. 사귀게 되니까 남자친구가 더 좋아요. 뭐랄까 되게 섬세하고 자상해요. 항상 칭찬해주고 괜찮다고 격려해주고 배려심도 많아요. 함께있으면 든든하고 따뜻해요.

“잦은 부상으로 제대로된 경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Q.2008년 WKBL 신입선수선발회에서 1라운드 5순위로 뽑혔어요. 순위 자체는 좋았으나 하필이면 뽑힌 팀이 당시 대단한 포스를 보여주던 강팀 신한은행이었어요. 개인적으로 꼭 좋지만은 않았을 듯 싶어요.

맞아요. 아무래도, 그런 면도 좀 있었어요. 명문 강팀에서 저를 뽑아준 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었지만 솔직히 이름이 불렸을 때 살짝 움찔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어요. 일단 고등학교 3학년때 무릎 수술을 했고 그로인해 거의 경기를 뛰질 못했던지라 1라운드에 뽑힐 것이다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선발만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안되면 연습생으로라도 뛰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죠. 헌데, 신한은행같은 팀에서 저를 높은 순위로 지명해주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더불어 신한은행이라는 이름이 가지고있는 무게감이 순간적으로 저를 확 덮쳐오는 기분도 함께 느꼈어요. 당시 레알신한이라고 불렸잖아요. 얼마나 강했으면 그랬겠어요. 멤버가 정말 탄탄했고 그런 팀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들더라고요. 이제 오래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장 떠오르는 그때 멤버가 전주원, 정선민, 최윤아, 진미정, 하은주, 이연화, 강영숙, 선수민, 김연주 언니 등 정말 많네요. 제가 아니라 아마무대를 씹어먹고온 최고 유망주라해도 당장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을듯 싶어요. 위상을 증명하듯 2008~09시즌 37승 3패로 무려 92.1%의 승률을 찍었어요. 그런 팀의 일원이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는 했지만 막 프로무대에 발을 딛은 신인 입장에서는 앞이 캄캄할 노릇이었죠.(웃음) 

 

 

​​​​Q.그래도 지명이 되었으니까 살아남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겠죠?
그럼요. 타고난 천재도 있겠지만 그때 잘나가는 언니들 중에서는 저같은 과정을 거쳐서 자리를 잡은 케이스도 적지 않을 것이란 말이에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저 또한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죠. 시작부터 고개를 떨굴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몸상태가 문제였어요. 몸이 회복이 되지않은 상태였던지라 입단후 첫시즌을 꼬박 재활로 시간을 보냈어요. 어차피 수술을 안했어도 당시 그 쟁쟁하던 멤버들 틈에서 얼마 뛰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리고 재활을 마친후 건강하게 복귀를 하나싶었는데 이번에는 허리를 다치고 말았어요.

​​​​Q.이런, 설상가상이었네요.
그러게요. 건강하게 좋은 컨디션으로 나서도 출장시간을 얼마나 가져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연거푸 큰 부상을 당하니까 의욕이 확 꺾였습니다. 농구를 그만둬야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런 찰나에 팀에서는 ‘대학교를 가면 어떻겠냐?’고 권하더라고요. 대학무대서 몸도 추스르고 실전 감각도 익히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적당한 때에 불러준다고 했고 저도 그게 맞겠다싶어서 수원대학교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후 학교측과 얘기를 마쳤고 한달 정도 쉰후 가려고 일정을 계획했죠. 그런데 당시 임달식 감독님이 전화를 주셔서 새로운 길에 대한 제의를 하셨고 그로인해 대학행은 없던 일이 되고말았습니다.

​​​​Q.제의요? 대학행보다 더 좋은 것이었나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좋은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당시로서는 그게 더 낫다고 판단했어요. 감독님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제 얘기가 나왔나봐요. 재능은 있어보이는데 신한에서는 뛸 자리가 없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셨고 다른 구단에서 관심을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다름아닌 신세계 쿨캣이었어요. 아무래도 당시 제 입장에서는 대학보다는 프로무대에서 뛰고싶은 마음이 컸던지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Q.신세계로 가서는 기회가 좀 있었나요?
신한은행이 워낙 멤버가 엄청나서 상대적으로 나아보였을뿐 신세계도 만만치않은 팀이었어요. 일단 제 포지션인 포인트가드에 김지윤, 김지현 두 언니가 계셨어요. (김)지현 언니는 저보다 5살많았고 (김)지윤 언니는 무려 14살이나 차이났죠. 실력적으로 저보다 월등한 언니들이었지만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있는지라 열심히하면 지윤 언니의 뒤를 이어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당연히 의욕이 넘쳤고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훈련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다시 부상을 당하고 말았어요. 무릎을 크게 다쳤고 또 수술을 해야만 했죠. 무릎, 허리 그리고 무릎…, 작은 부상은 차지하더라도 길지않은 시간동안에 큰 부상만 3번을 당하니 몸도 몸이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그렇다보니 또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술후 긴 재활의 시간을 거쳐야하고 그 과정이 끝났다해도 바로 몸상태나 컨디션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니까 코트로 돌아와도 출장시간을 많이 가져가기 힘들었죠.

 

 

​​​​Q.육체적인 부분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말한데로 정신적인 부분에서 많이 힘들었을 듯 싶어요.
큰 부상의 후유증이라는게 바로 그런 것 같아요. 어지간한 부상같으면 다들 참고 뛴단 말이에요. 기회라는게 쉽게 찾아오지도 않고 소중한 출장시간을 놓치고 싶지않으니까요. 하지만 수술이 필요한 큰 부상은 제 의지와 관계없이 치료를 해야하거든요. 수술 그리고 재활을 거치다보면 많은 시간이 지나있고 좋을 때의 몸상태로 돌아오려면 거기서 다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다보면 어느새 저는 전력외 선수로 밀려버리게 되더라고요. 이미 있는 선수들로 손발을 맞춘 상태에서 백업 멤버인 저에게 출장시간을 보장하기는 감독님 입장에서도 쉽지않았을테니까요. 그러다보니 언니들을 뛰어넘고 싶다는 당초 목표는 커녕 밑에서 치고올라오는 후배들 조차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막 신인 때는 그래도 나는 유망주니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후배들이 생기니까 그런 위안조차 가져가기 쉽지않았죠. 농구 실력이 늘기 위해서는 자신감도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런 부분에서도 꺾이게 되니까 어쩌다 코트에 나서도 본래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겉돌게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Q.길지않은 시간동안 너무 많은 시련이 오갔네요.
아마 찾아보면 저보다 더한 선수들도 많았을거에요. 하지만 사람은 어디까지나 제 위주로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요. 당시에는 나이도 어렸고, 정말 하루하루가 힘들었어요.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농구를 접는게 맞을까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습니다. 그러던중 신세계가 해체가되고 새로이 하나은행이 창단되었어요. 그것과는 관계없이 은퇴를 결심했고 농구계를 떠나려고했는데 팀에서 매니저를 권유했고 1년 정도 해당 일을 했습니다.

​​​​Q.1년요? 매니저일이 적성에 맞지않았나요?
적성하고는 관계없이 그 기간동안 변화가 있었어요. 기존 조동기 감독님에서 박종천 감독님으로 사령탑이 교체됐고 그러한 과정에서 스탭들이 와르르 잘리게 된거죠. 저같은 초보 매니저는 말할 것도 없었고요. 이제는 진짜 농구와의 인연은 끝인가보다 생각하던 찰나 실업팀 사천 시청에서 불러주셨어요. 개인적으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창한 나이였던지라 어떤식으로든지 코트와의 끈을 이어가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한 2년 정도 뛰었죠. 그리고는 제 농구 인생을 건 무모한 도전을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Q.무모한 도전요?
2015년 10월 27일 있었던 WKBL 신인 드래프트에 다시 도전장을 내기로 한거죠. 어려울 것이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었어요. 주변에서도 만류했고요. 6년이나 지나서 가능성이 있겠냐는 것이었죠. 당시 사천시청에서도 반대하더라고요. 드래프트 신청할거면 팀에서 나가라고했고 이에 저 역시 알겠다고하고 사천시청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후회하지않아요. 농구를 너무 사랑했고 그런만큼 미련도 많았어요. 그렇게라도해야 제2의 농구인생을 살던 지 아니면 거기서 끊던지 뭔가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결과는 당연히 안됐어요.(웃음) 온양여고 윤예빈과 대만에서 귀화한 진안이 각각 1, 2순위의 영광을 차지한 가운데 신재영(모 김화순), 이민지(부 이호근) 등 농구인 2세 등이 지명을 받으며 화제를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차혜진 언니랑 함께 도전했지만 말 그대로 도전에 만족해야 했죠.

​​​​Q.코트하고는 그렇게 이별한 것인가요?
그런셈이죠. 나름대로 제 상황에서 할 것은 다 해봤으니까 후회는 없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드래프트 신청했을 때 제 스스로도 무모하다고 생각했어요. 혹자는 사서 망신을 당하느냐고 그랬지만 저는 개의치않았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드래프트에 참가했을 때처럼 연습생으로라도 프로무대를 다시 밟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농구가 좋았으니까요. 어쨌든 그렇게라도 농구를 끊고 다른 일을 하려고 생각해보니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제가 운동을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했거든요. 어찌보면 이전까지의 모든 인생을 농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지라 다른 세계를 전혀 알지 못했어요. 비슷한 또래와 비교해도 엄청나게 늦은 출발인 것이죠. 남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쯤하던 고민을 저는 그제서야 하게 됐습니다.

 

 

“살을 빼라고 어머니가 시킨 농구, 평생의 친구가 될줄은 몰랐습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막 농구공을 잡았던 것까지 합치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부모님이 두분다 운동을 하셨던지라 운동이 가지는 매력 등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유도 어머니는 육상선수 출신이세요. 농구같은 경우 본래는 작은 언니가 먼저 시작했었고 저는 농구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던중 어머니가 농구를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큰 의미는 없었어요. 당시 제가 좀 뚱뚱한 편이었는데 언니 따라가서 운동좀 하면서 살을 빼라는게 이유였죠. 그래서 본의아니게 농구의 길로 접어들게 됐습니다.(웃음) 안타깝게도 언니는 중간에 농구를 그만뒀어요. 중학교 3학년때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던 이유가 커요. 당시는 의학기술도 그렇지만 재활 등의 개념이 없어서 그정도 부상을 입으면 그만두는 선수가 적지않았어요. 그래도 고등학교까지는 농구부 활동을 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습니다.

​​​​Q.학창시절 활약상은 어땠나요?
나쁘지는 않았어요. 지금이야 작은 키지만 중학교 때까지는 나름 밀리는 사이즈도 아니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코트 위에서 제 위주로 경기를 풀어나갔고 각종 시합에서 두자릿수 득점을 꾸준히 했어요. 스피드나 코트 비전같은 부분에서도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제 자신이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었고 그로인해 경기장에서 더욱 자신감있게 플레이를 펼쳐나갔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처음에는 포인트가드를 쭉 했는데 이후 동포지션에 괜찮은 후배들이 들어오자 2번으로 빠져서 주득점원 역할을 주로했어요. 밀려서 그런 것이 아닌 득점리더로 나섰다고보는게 맞을거에요.

​​​​Q.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부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궁금하기도 해요.
그것 때문에 더 농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부상이 없었다면 얼마나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제 스스로는 중요한 순간마다 다치면서 건강한 몸, 제대로된 컨디션으로 뛰지를 못하니까 너무 아쉽고 답답한거에요. 고등학교 때는 주변에서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농구를 했는데 프로에 오니 존재감도 없고 팬들도 대부분 이름을 모르는 그런 선수가 되어 있었고요. 저같은 경우 훈련도 제 스스로가 만족할 때까지 독하게 하는 편이거든요. 프로농구선수로서 너무 보여준게 없어서 스스로가 만족을 못하지 않았나 싶어요. 늦은 나이에 드래프트까지 다시 참가하며 할 수 있는 도전은 나름 해봤지만 사실 지금도 프로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아쉬운게 꽤 있어요. 가끔 어딜가면 저를 가리키면서 ‘쟤 1라운드 출신 프로농구선수였어’라고 소개를 해주는 지인들이 있어요. 마음은 고마운데 제 스스로는 민망할 때도 적지않아요. 탁 터놓고 말해서 저를 알거나 기억하는 농구 팬들은 많지 않을걸요. 그런 상황에서 프로 농구선수 출신으로 나서기가 좀 그렇더라고요.

​​​​Q.농구를 그렇게까지 좋아했는데 스킬트레이너 등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사실 농구를 가르치는 쪽에서도 조금 일을 했었어요. 그렇게라도 농구공을 잡고 코트에서 숨쉬는게 저도 좋더라고요.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어요. 시작할 때는 열심히 가르치기만하면 되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학부모님들도 상대하고 그래야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농구외적인 부분에서 스트레스가 너무 쌓였어요. 너무너무 요령있게 학부모님들 기분도 맞춰주면서 잘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힘들더라고요. 주변에서는 선수 출신에게는 지도자로서의 길이 좋다고 얘기를 많이 해주시는데 저는 하면 할수록 어렵고 적응도 안됐어요. 자격증도 준비 되어있고 제의도 몇 번 들어왔지만 선뜻 못 덤비겠더라고요. 농구 외적으로 할 일도 많고 다양한 분들과의 관계도 힘들고…, 한마디로 말하자면 적성에 안맞았던거죠.

​​​​Q.그럼 지금은 농구는 안하는 것인가요?
아뇨. 직업적으로 안할뿐이지 농구공은 놓지않고있어요. 동호회 농구같은데도 자주 나가고 길가다가 농구 골대 보이면 혼자 농구공 가지고 가서 슛이라도 던져보는 등 농구사랑은 여전합니다. 얼마전에는 ‘꺄르르’라는 팀 소속으로 지역실업리그에 참가해 우승도 하고 그랬어요. 제가 생각해도 저는 정말 농구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주변에 선후배들보면 아예 코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않는 이들도 많거든요.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지긋지긋하다. 이제는 관심이 떨어졌다 등 이유도 다양해요. 그런점에서 저는 제가 생각해도 별종이 아닐까 싶어요. 도대체 뭐가 얼마나 즐거운 추억이 많아서 이리도 농구를 좋아하는 것인지….(웃음)

 

 

​​​​Q.꾸준히 운동을 하실 정도면 몸상태는 무척 좋으시겠네요?
사실 그렇지도 않아요. 제가 은퇴후 허리수술을 두 번이나 했어요. 지난해 6월에 수술을 했으니까 한 1년하고 2개월 정도 된 것 같네요. 신한은행 시절부터 다쳤던 허리가 좋지못했는데 제대로 치료와 재활을 하지못했어요. 신인이기도했고 눈치도 조금 보였었고, 이런저런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죠. 그 이후 헬스장 트레이너 일을 했었는데 허리가 완쾌되지않아 꾸준히 좋지않더라고요. 안되겠다싶어 수술을 한건데 현재는 괜찮아요. 하지만 무리를 하면 안되는데 그게 잘되지 않더라고요. 트레이너 시절에도 수술후 2주 정도 쉬고 바로 출근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더 안좋아진 영향도 있고요. 차라리 일상 생활에서는 나름 조심한다고 조심하는데 다들 아시다시피 운동할 때는 그게 잘안되잖아요. 돌발적인 상황도 많고 그로인해 위험한 동작도 많이 나오고, 또 피가 끓고 그럴 때는 저도 모르게 과한 체력과 힘을 쓰기도 하고요. 결국 1차 수술 후에도 허리가 낫지않아 다시 병원을 찾았는데 허리 뒤쪽을 절개해서 수술을 해야한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때도 나름 많이 쉰게 한달이었어요.(웃음)

​​​​“저에게 농구는 행복입니다”

​​​​Q.개인적으로 지난 농구인생을 돌아보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일단 고등학교 3학년때 무릎 수술했을 때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아마에서의 마지막 해인지라 그때 몸상태나 컨디션이 가장 좋았어야 했는데 하필 그때 다쳐버려 가지고 정신적으로 힘들고 쫓기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를 돌아보면 제가 참 미련했던게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됐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부분이에요. 저같은 경우 아프거나 그러면 그때그때 얘기를 해야되는데 말을 안하고 참는 스타일이에요. 이게 지나고나니 굉장히 안좋은 것이더라고요. 정신적인 부분에서야 참아내고 그런 것이 운동선수에게 필요한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육체적으로는 안좋은 부분을 더 키울 수 있어 결국에는 해가 되더라고요. 당시에도 무릎이 아팠지만 참고 참고 또 참다가 3월에 춘계대회끝나고나서 우승하고 수술을 했거든요. 정말 암담했어요. 보여준 것도 많지않은데 가장 중요한 시기에 드러누워버렸으니 꿈에 그리던 프로행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컸습니다. 두 번째는 신한은행때에요. 의욕은 넘치는데 뭘좀 해보려고하면 다치고 그러니까 멘탈적으로 견디기가 쉽지않더라고요.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재활하는 긴 시간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정신적으로 자꾸 지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 외에도 더 있겠지만 앞선 두 개가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다른 것은 생각이 잘 안나네요. 당시에는 힘들었겠으나 이제는 잊어버렸습니다. 그냥 늘 하던데로 버티지 않았나싶어요. 운동선수들의 삶은 버티기의 연속이거든요.(웃음)

​​​​Q.얘기를 쭉 들어보니 성격이 긍정적인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해도 그런 부분이 많은 듯 싶어요. 그런 성향을 타고나기도 했지만 스스로 ‘괜찮을거야’라고 되내이면서 노력한 부분도 있어요. 중학교 시절 훈련도 그렇지만 잦은 폭력과 체벌이 너무 두렵고 힘들어서 선수들끼리 도망가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요즘이야 안그렇겠지만 저 때도 때리는 문화? 악습? 그런것이 존재했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때까지도 맞으면서 운동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대부분 도망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분위기였는데 저만 반대했어요. 그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선수들을 설득했어요. 다행히 당시 주장이었던 제 말빨이 먹혔는지 결국 도망은 가지않게 되었습니다.

 


​​​​Q.고3때까지 맞았다면 정말 힘들었겠어요?
맞아요. 훈련도, 부상도 힘들었지만 맞고 기합받고 그런 상황은 끝까지 적응이 안되더라고요. 매순간이 두렵고 고통스럽고 그랬을거에요. 저 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 모두…, 당시에 부모님들이 돌아가면서 밥을 해주셨는데 그렇게 맞고나서 부모님을 뵈면 감정이 격해지잖아요. 최대한 티를 안내고 노력했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하는 것을 참고 또 참았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부상만 아니었으면 저는 쫓겨날 때까지 계속 코트에 있었을거에요. 연습생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농구를 해왔으니까요. 그만큼 농구가 좋았고, 힘든 순간에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Q.당시 롤모델같은 선수로는 누가 있었을까요?
학창시절에는 당장 코앞이 걱정되던 때인지라 딱히 롤모델이나 우상 그런 존재가 없었어요. 다만 프로에 올라가서 같은 포지션의 전주원 언니 그리고 정선민 언니를 좋아했어요. 너무나 높은 존재들이었지만 막연히 나도 저런 선수가 되고싶다는 꿈을 품었던 거죠. 특히 (정)선민 언니는 같은 여자가봐도 너무 멋있었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많은 힘을 쏟는 것 같지도 않은데 경기 자체를 지배하는 모습이 흡사 만화 캐릭터를 보는 것 같았어요. 슛도 정말 정확하고요. 마치 어떤 경지에 오른 느낌? 그런 것을 언니에게서 느꼈습니다. 제가 선민언니 방졸이었어요. 처음에는 너무 어렵더라고요. 그렇지않아도 하늘같은 대선배신데 말투도 딱딱하셔서 진짜 무서웠어요. 말투도 그렇고 직설화법을 쓰시는 분인지라 왜 저렇게 말씀하시지라는 생각도 들고 이래저래 눌리게 되더라고요. 사람은 많이 겪어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잖아요. 지내다보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저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일관성이 있던 분이었죠.(웃음) 거기다 츤데레처럼 은근히 잘 챙겨주시는 성격인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언니가 좋아지더라고요.

​​​​Q.기억에 남는 외국인선수는 있을까요?
하나은행에 있을 때 나키아 샌포드가 기억나요. 제가 매니저를 할 때였어요. 청주로 원정을 가야하는데 시간이 넘어서도 샌포드 언니가 안오는거에요. 당시 통역하던 친구가 저랑 동갑이었는데 둘이 같이 안오더라고요. 연락도 계속 안되고해서 할 수 없이 먼저 출발했어요. 두사람 때문에 모두가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아이구…, 그런데 알고보니 전날에 둘이 술을 마신거에요. 그리고 늦잠을 잔거죠. 구단 입장에서 외국인선수를 혼낼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대신 저희 매니저들이 엄청 혼났어요. 선수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죠. 지금도 종종 페이스북으로 연락하고 지내고 그래요.

​​​​Q.마지막 질문입니다. 김지수에게 농구란 무엇일까요?
행복인 것 같아요. 그때 그때 좋았던 순간도, 아쉬웠던 순간도, 힘들었던 순간도 모두 있었지만 지나고나면 즐거움으로 다 귀결되더라고요. 힘들었던 것은 잠깐이면 잊혀지고 좋았던 것만 남았어요. 그래서 제가 농구를 좋아하나봐요. 저에게 농구는 그냥 행복입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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