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과 포퓰리즘 [최정봉의 대박몽]
로또 이야기 11
정부 청사 앞에 수천 명의 복권 판매업자들이 모였다. 1950년부터 37년간 발행돼 왔던 애국장권(愛國獎券 : 애국복권) 중단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린 것이다. 며칠간 지속된 시위는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복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1987년 12월 대만의 광경이다.
대만의 첫 복권은 1906년 식민지 시절 시작됐다. 중국인들의 만성적 도박 습성을 전근대적 병폐로 여긴 일제는 ‘문화 개선책’의 일환으로 복권을 선택했다. 하지만 복권을 둘러싼 각종 사기와 분쟁이 급증하자 7개월 만에 취소했다.
애국복권이 도입된 것은 해방 후 1950년이었다. 이름에 걸맞게 대중국 군사비용 조달과 치솟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목적으로 내세웠다. ‘애국심을 발휘하면 부자가 될 행운이 생긴다’는 슬로건을 내건 국민당 정권은 관련 법령이 통과되기도 전에 발매를 시작할 만큼 절박했다.
애국복권
한국도 애국복권이 발행된 역사가 있다. 서울신문(2018년 3월 18일자)에 따르면 한국의 애국복권은 2차에 걸쳐 시행됐다. 1차는 1951년 6·25전쟁 도중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재민 구호를 목적으로, 2차는 1956년 서울 환도 후 전쟁 복구 자금을 목적으로 진행됐다.
부산 국제시장 등 10개소에서 발매된 첫 애국복권은 교통순경이 질서 유지에 나서야 할 만큼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당첨률이 낮아서인지 2회 차의 판매 실적은 극히 저조했다. 이에 당국은 홍보 가두 행진을 조직했고 부산극장 같은 번화가에서 밴드·가수·무용수들을 동원한 판촉 행사를 급조했다.
4회로 단명한 1차 애국복권에 이어 5년 뒤 2차가 부활됐지만 더 한심한 장면만 연출됐다. 발행을 담당한 조흥은행 직원들의 복권 횡령 사건이 터졌고 재무부는 판매 부실을 덮기 위해 공무원들의 급료에서 강제로 복권 대금을 공제해 빈축을 샀다. 각 동사무소에 할당된 강매로 연명하던 2차 애국복권은 10회를 끝으로 종료됐다.
대만의 애국복권 역시 초기 운전 미숙을 면치 못했다. 첫 발행은 1950년 4월 11일, 장당 15위안에 최고 상금 6만 위안을 내걸었다(사진1). 특이한 점은 당시 회사원 평균 연봉의 140배에 달하는 거액의 상금에도 시민들의 반응이 냉담했다는 사실이다.
특이하게도 티켓 가격을 5위안으로 3배 낮추고 최대 상금 역시 2만 위안(당시 타이베이 평균 주택 가격)으로 3배 축소된 후부터 판매 호조가 시작됐다. 초대형 대박보다는 저렴한 티켓 가격의 유혹에 마음이 동했던 대만 시민의 경제 심리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유사한 성향은 특별 복권에서도 나타났다. 1973년 동전 부족 사태가 벌어지자 대만은행은 전액 동전으로만 구매할 수 있는 특별 복권을 발행했다. 거액의 상금 대신 컬러 TV 같이 서민적이고 ‘소박한’ 생활 가전을 당첨품으로 내걸었지만 시중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사진1> 1950년 첫 발행된 대만의 애국복권(대만 파노라마)
<사진2> 1951년 제2회 대한민국 애국복권(한옥션)
숨은 진실
‘대만인적발재미몽(臺灣人的發財美夢)’의 저자 류웨이칭(劉葦卿)은 애국복권이 서민들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 문화였다고 주장한다. 일상 대화의 주제였음은 물론이고 ‘복권 송(song)’ 같은 대중가요를 비롯해 다수의 영화·소설·만화들이 애국복권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이미지에는 변모하는 대만 사회의 관심과 정체성이 투영됐다(사진3). 1950년대는 공산당에게 ‘빼앗긴’ 본토 수복의 열망을, 1960~1970년대는 관우 같은 위인과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1980년대는 핵발전소처럼 현대적 인프라와 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애국심을 자극했다.
1962년부터 복권 삽화를 담당해 온 린신슝(林幸雄)의 명성 또한 상당했는데 불행히도 그는 25년간 세 번이나 납치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가 당첨 번호를 알고 있다는 항간의 소문이 화근이었다. 복권을 둘러싼 납치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등 당첨자가 납치된 사건, 복권 판매업자가 납치된 사건들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1987년 12월 27일 마지막 추첨을 며칠 앞두고 대만은행 복권 국장의 10대 아들이 유괴됐다. 범인들은 아들의 몸값으로 1등 추첨 번호를 내놓으라는 황당한 요구를 내걸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괴범들은 복권 발행 지속으로 요구 조건을 변경했다.
복권 지속을 요구한 유괴 사건과 복권 중단을 규탄한 대규모 시위…. 아무리 애국복권이 대중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사실 대만 시민이 간절히 지키고자 했던 것은 애국복권 그 자체가 아니라 애국복권이 있어야만 지속 가능한 대중적 투기, ‘다자러’였다.
모두의 기쁨 혹은 모두를 위한 기쁨을 뜻하는 다자러(大家樂)는 불법 복권이었다. 민간업자들이 고안하고 직접 운영한 다자러는 애국복권 당첨 번호의 두 끝자리 수를 맞히는 방식의 투기였다. 다시 말해 애국복권 추첨 결과에 도박을 건 파생형·기생형 복권이었다.
<사진3> 대만 애국복권 이미지(이베이)
애국에 올라탄 불법
1982년 등장한 다자러는 단숨에 애국복권의 인기를 압도했다. 폭풍 성장의 동력은 높은 당첨률이었다. 애국복권의 끝자리 두 숫자를 맞히는 것이니 경우의 수는 고작 100개, 따라서 당첨 확률도 100분의 1이었다.
게다가 90%의 상금 지급률을 내세웠으니 애국복권의 인기를 능가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수익의 50%가 정부 주머니로 들어간 애국복권과의 대조가 부각되면서 정치적 파장도 몰고왔다. “애국복권은 관료들의 배를 채우지만 다자러는 국민 주머니를 채운다”, “다자러는 애국이 아닌 애민 복권이다”는 뼈 있는 농들이 나돌았다.
직접 숫자를 선택한 다자러는 또 다른 사회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신문에 당첨 번호를 판매한다는 사기성 광고가 등장했고 <사진4>처럼 과거 패턴 분석에서 차기 예측까지, 사례 분석에서 수학적 진단까지, 당첨자 인터뷰에서 명당 판매점 소개까지 아우른 전문 잡지와 소책자들도 범람했다.
민간 신앙의 붐도 거셌다. 향의 연기 패턴으로 숫자를 읽은 사람부터 신묘한 기도법을 개발하는 사람, 조상이나 신의 계시를 구하는 사람부터 영험한 귀신을 찾아 다니는 사람까지 당첨 숫자를 점지 받겠다는 애타는 마음은 미신적 풍속을 재소환했다.
그 덕분에 신당과 사찰은 북새통을 이뤘다. 신이 자신의 기원을 저버리거나 영험함이 부족하다며 신전 동상을 훼손 혹은 방화하는 사건들도 빈번했다. 이렇게 난데없이 수난을 겪는 신들을 가리키며 뤄난선밍(落難神明)이란 조어가 생길 지경이었다.
<사진4> 당첨 기법을 소개하는 수많은 책자들(타이베이타임스)
복권 포퓰리즘
인기 때문에 은행은 현금 부족에 시달렸고 언론은 연일 사기와 폭력, 파산과 자살 소식을 퍼 날랐다. 1987년 7월 13일 타이베이 남부 신추시에서 발생한 은행 강도 사건은 다자러로 전 재산을 탕진한 평범한 노동자의 소행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자 공권력이 개입했다. 당국으로서는 당첨 확률과 상금을 높여도 효력이 없던 애국복권의 인기를 되찾을 기회이기도 했다. 1986년 7월부터 1년간 무려 6000건의 다자러 단속이 집행됐다. 하지만 점조직의 날렵함을 당할 수 없었고 부패 경찰과의 연계 때문에 단속은 늘 허탕이었다.
조직원들은 식당·미장원 등으로 근거지를 옮겨 다녔고 사원과 신당 안에서 불법 복권을 판매한 경우도 허다했다. 사원과 신당 앞에는 노점상들이 즐비했고 각종 공연과 퍼포먼스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최적의 은신처가 됐다.
류웨이칭은 다자러 판매책들이 깊은 산악 지역을 제외한 구·읍·면의 88%에 침투했고 1987년 기준 매달 100억~500억 위안의 거래 규모였다고 추정했다. 그는 또 대만 총인구의 25% 정도가 다자러에 빠져 있었다고 기술했지만 복권 연구가 적해원 씨는 인구의 39%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위궈화(兪國華) 대만 총통은 다자러를 “심각한 사회 병리 현상”이라고 규정하며 대처 위원회를 구성했다. 애국복권 폐지를 통해 다자러 근절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위원회는 오히려 존속을 권고했다. 애국복권이 사라져도 다자러는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위원회의 예측대로 애국복권이 폐지되자 다자러는 홍콩의 마크 식스 복권(Mark Six Lottery) 당첨 숫자에 대한 투기로 이어졌다.
다자러는 국가가 운영한 애국복권에 기생한 민간인들의 불법 도박이었을 뿐이다. 이 가소로운 불법 도박이 국가의 공식 복권을 전복한 무엄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극강의 당첨 확률과 상금을 내세운 포퓰리즘형 투기 앞에 충성도 애국도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을까….
최정봉 사회 평론가, 전 NYU 교수
Copyright © 한경비즈니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