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39년차 김종수 “연기는 ‘나’를 찾는 과정…불안한 삶 위안”[이현정의 프리즘]
영양실조·빈털털이어도 “연기 포기 안해”
‘밀양’이 바꾼 삶…영화·드라마 ‘종횡무진’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배우 생활을 하면서 ‘난 뭐지?’ 혹은 ‘생각하는 게 나인가 아니면 껍데기가 나인가’라는 생각을 해요. 제가 아직 뭔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저 작업의 쓰임새에 맞게 연기하면서 제 가치를 느끼고 나를 찾아가고 있어요.”
영화 56편. 드라마 17편. 연극 70여 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리즈까지 포함하면 출연 작품만 140편이 훌쩍 넘는다. 과거 드라마 단역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다. 탄탄한 연기력으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배우 김종수의 이야기다.
올해 영화만 5편에 이른다. 영화 ‘드림’을 시작으로 ‘밀수’와 ‘비공식작전’으로 관객들을 찾았고, 곧 개봉 예정인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과 ‘화란’ 등에서도 큰 활약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늘 새롭다. 친근한 옆집 아저씨 같다가도 때론 피도 눈물도 없는 빌런이 된다. 절절한 부성애로 관객들의 눈물을 쏙 빼기도 하고, 속정 깊은 샐러리맨이 되기도 한다. 대통령, 안기부장, 법원장부터 언론사 편집국장, 경찰, 선생님까지 안 해본 역할이 없다.
두 달 뒤면 환갑을 맞는 김종수. 이중 연기 생활만 38년에 달한다. 인생의 약 3분의 2를 연기에 쏟은 셈이다. 연기의 내공과 삶의 연륜이 묻어날 연차이지만, ‘배우’ 김종수는 여전히 삶에 대한 물음표를 가지고 있다. 헤럴드경제는 최근 서울 청담동에 있는 소속사 아티스트컴퍼니에서 김종수를 단독으로 만나 그가 걸어온 연기 인생을 되돌아봤다.
김종수가 연기에 처음 발을 디딘 건 지난 1984년 대학 시절이다. 울산의 연극 극단 ‘고래’가 단원을 모집하는 포스터를 보고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듬해 연극 ‘에쿠우스’의 주연으로 데뷔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팔레트를 깔아둔 도시락 창고에서 밤새 연습했다. 한창 연습할 땐 몸무게가 48㎏까지 빠질 정도였다.
“거창한 것 하나도 모르고 그냥 시작했어요. 산에 올라가 소리 지르며 발성 연습을 하고, 극단 형이 가르쳐 주는 대로 대사 연습을 했죠. 그때 형이 ‘연기는 이런 거야’라고 가르쳐주지 않고 연기를 느끼게 해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참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연기는 고등학교 시절 남몰래 키운 꿈이다. 선생님이 준 티켓으로 우연히 본 연극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결정적이었다.
“연극 무대라는 걸 처음 봤는데 ‘저거 너무 재밌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선한 충격이었죠. 부모님의 반대가 워낙 심했어서 화학과로 우선 대학을 진학하고 부모님 몰래 연극을 시작했어요.”
그때는 재미와 열정이 전부였다. 경남연극제에서 연기상을 받으며 실력도 곧 소문이 났다. 약 20년 동안 그가 활동한 연극 작품만 70여 편에 이른다.
“지하 연습실에서 뭔가를 만들어가며 연기하는 자체가 너무 재밌었어요. 무대의 행위로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게 매력적이었죠.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던 당시, 생각이 앞선 형들도 멋있었거든요.”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기에 대한 열정만으론 먹고 살기가 쉽지 않았다. 월세가 없어 친구 집에 얹혀 살기도 하고, 30대 중반 무렵엔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했다. 이런 이유 탓에 부모님께 자신의 연기 활동을 10년 간 알리지 않았다.
“먹고 살 구실을 하려고 해도 여의치 않더라고요. 난 돈과 인연이 없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죠. 관객한테 매번 감동은 못 주더라도 ‘종수 연기는 재밌다’ 이런 자존심 하나는 가지고 살았어요. 부모님 얼굴에 먹칠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부모님 모시기엔 인간 구실을 못했죠.”
생계를 위해 현실로 뛰어들어야 했다. 교육, 아동 극단, 방송 VJ, MC, 성우 등 연극을 병행할 수 있는 일자리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한 달에 200만 원만 벌면 원하는 연극을 평생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재밌고 좋았지만 힘들었어요. 사람 구실을 못하고 사나 하는 생각에 소주만 마시면 한숨이 나왔어요. 친구들은 다 잘 나가는데 전 15만 원짜리 월세방에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연극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런 그에게 찾아온 전환점은 2007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었다. 당시 이 감독이 사투리를 쓰는 배우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동료 배우들과 무작정 오디션에 지원했다. 한껏 준비해서 오디션에 임했지만, 이 감독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뒤 연락이 왔다. 오디션을 봤던 역할보다 대사가 더 많은 역을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부동산 사장으로 변신한 그는 영화에서 송강호와 전도연과 함께 땅을 보러 다녔다.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알린 순간이었다.
“그때 참 감사했던 건 영화라는 매체에서 긴장하지 않도록 감독님과 배우들이 참 많이 배려해줬어요. 예를 들어, 감독님께 카메라 렌즈나 앵글 같은 걸 여쭤보면 섬세하게 하나 하나 가르쳐 주셨죠. 경청할 줄 아는 분이셨어요. 송강호 배우도 제게 (성공의) 기회가 무조건 올 것이라며 용기를 주곤 했어요.”
‘밀양’ 이후 단편 영화계의 러브콜이 쏟아졌다. 이는 곧장 ‘풍산개(2010)’, ‘홈 스위트 홈(2012)’ 등 수많은 영화 및 드라마의 출연으로 이어졌다. 연극의 주 무대였던 울산에서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던 그는 결국 지난 2014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수중엔 월세 30만 원짜리 옥탑방을 마련할 수 있는 보증금 500만 원이 전부였다.
“삶이 늘 미완성처럼 느껴졌어요. 사람들의 보편적인 기준에 맞춰 살지 못했으니까요. 나이 50살에500만원 들고 옥탑방에서 사는 게 사람들이 보기엔 얼마나 한심했겠어요.”
유명 드라마 ‘미생’에 출연한 시점도 이 때다. 그는 냉철한 원칙주의자이지만, 따뜻한 속정이 있는 김부련 부장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사람들은 그를 볼 때면 ‘부장님’이라고 부르며 팬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를 부끄러워했다.
“옥탑방에서 사람 구실을 걱정하면서 사는데, 사람들이 절 보면 부장님이라고 부르면서 좋아해주셨어요. 전 김부련도 아니고 이상적인 어른도 아니거든요. 그런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게 부끄러웠죠. 드라마 ‘미생’은 삶의 교본 같은 작품이었거든요.”
수십 개의 작품에 출연하며 그는 캐릭터에 몰입하는 만큼 캐릭터를 떠나보내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그러나 유독 떠나보내기 어려웠던 캐릭터가 있었다. 민주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의 박종철 군의 아버지 역할이다. 그는 극중 차디찬 강에 아들의 유골을 흘려 보내며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는 대사로 관객들을 눈물샘을 자극한다.
“처음에 감독님께 다른 배역을 주면 안되냐며 거절했었어요. 살아있는 분을 연기하는 게 민망했고, 감히 제가 이 인물을 표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촬영을 다 마치고선 요양병원에 계신 박종철군 아버님께 인사를 드렸어요. 캐릭터가 잘 안 떠나갔는데 그제서야 캐릭터를 보낼 수 있었죠. 일종의 부채 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시대를 살았지만 당시 아픔을 깊이 공감하지 못하고 나중에야 큰 미안함을 느꼈죠.”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만 수십여 편에 달하지만 여전히 영화라는 매체가 매력적이라고 했다. 단순히 연기의 재미를 넘어서서 불안한 그의 삶을 위로해준다는 이유에서다.
“작품 안에서 누군가가 되어 뭔가를 선택하면 불안한 제 삶에 위안이 됐어요. 삶은 늘 선택의 기로에 있잖아요. 작품 내 선택들이 명쾌하게 느껴졌죠. 캐릭터를 고민할 때도 답을 내야지만 연기할 수 있거든요. 그런 작업이 즐거워요.”
그가 작품에 임하는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작품에서 홀로 튀기보단 작품 속에 녹아드는 것. 그리고 그렇게 기억되길 원한다고 강조했다.
“유명 배우도 감사하지만 작품 안에서 녹아있는 배우나 좋은 작업자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저 혼자의 힘으로 (작품이) 되는 게 아니고, 현장에서 작품의 방향과 색깔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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