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 사다리에 좌절한 청춘의 자화상은 계속된다 [조원경의 현인들의 경제적 조언]
오노레 드 발자크(1799. 5~1850. 8)는 프랑스 소설의 대가다. 그는 소설가, 극작가, 문예비평가, 수필가, 저널리스트, 인쇄업자 등으로 활동했다. 1829년부터 1855년까지 출간된 90편이 넘는 소설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은 작품 ‘인간 희극’을 남겼다. ‘100편의 해학 이야기’를 비롯해 청년 시절에 필명으로 쓴 소설들과 25편의 완성되지 못한 작품을 창작했다. ‘미지의 걸작’과 같은 철학적인 소재를 다룬 소설, ‘나귀 가죽’과 같은 판타지소설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다. 그는 ‘고리오 영감’이나 ‘외제니 그랑데’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 문체에 두각을 보였다.
기자는 한국은행에 다니다 퇴사한 20대 청년을 만난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임직원 평균 연봉이 1억원을 돌파했다. 중앙은행 직원으로서 위상과 평판은 여전히 높다. ‘신의 직장’으로 통한다는데 20·30대 직원과 직장인 익명 게시판 앱인 ‘블라인드’에는 자괴감과 분노의 글이 가득 차 있다. 7월에만 8명의 직원이 한국은행을 떠난 게 상당히 궁금했다. 어렵게 수소문한 J는 말문을 열었다.
“본인들은 모두 누려놓고서는 젊은 직원들을 위해선 하등의 신경도 안 씁니다.”
선배들이 들으라는 말이었으나 비판의 톤이 너무 세다. J는 그가 희망을 줄 현실과 미래를 찾아 한국은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20·30대 직원을 대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평균의 함정’은 말하고 싶어요. 20·30대 직원의 연봉은 4000만~7000만원입니다. 절대적 기준으로 연봉이 작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란 게 그렇잖아요. 비교 상대는 늘 주변 친구와 대학 동기죠. 그들과 견줘보면 많지 않아 박탈감이 상당합니다. ‘치열한 입사경쟁의 결과물이 고작 이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자는 문득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의 이야기를 꺼낸다.
“J씨 이야기가 마치 ‘고리오 영감’이라는 소설을 생각하게 하네요. 그 소설 아세요?”
J는 우연히 읽은 소설이고, 자신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서울에 와서 하숙을 했기에 과거 신분제 시절 이야기지만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흠. 소설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시골에서 상경해 명문대를 나온 내겐 참 인상적이었죠. 나는 그때 마치 ‘청운의 꿈’을 안고 이제 막 파리에 상경한, 잘생긴 청년 라스티냐크라는 법대생 같다고 생각했어요. 풋! 시공을 초월해 나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죠. 내가 사는 하숙집은 상당히 괜찮았지만 부모님께 늘 손 내미는 나 자신이 미웠죠.”
파리의 한 하숙집에 고리오 영감이 있었다. 그는 국수 제조업으로 큰돈을 벌어 두 딸을 귀족에게 시집 보낸다. 고리오 영감이 전 재산을 두 딸의 지참금으로 지급한 후에 그들은 아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도회 파티나 돈이 필요할 때만 그를 찾는다. 기자는 책을 꺼내들고 책 속의 하숙집 관련 구절을 떠올려본다.
‘그곳에는 시적인 데라곤 전혀 없는, 가난이 있다. 더 이를 데 없이 궁핍하고 넝마 같은 가난이 도사리고 있다. 그 가난은 진흙이 묻지 않았다 해도 얼룩이 지고, 구멍이나 누더기가 없더라도 곧 썩어 넘어질 지경이었다.’
J는 자신은 돈만 좇는 승냥이는 아니라고 외친다. 높은 서울 집값에 결혼도, 가정도 꾸리기 어려운 현실 앞에 서 있는 자신을 생각하면 초라해진다고 생각하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고, 이직 사유라고 했다.
“가난한 하숙집에서 부의 야망에 동승하려는 라스티냐크는 법전 대신 오직 출세에만 관심이 있죠. 책을 보면 같은 하숙집의 보트랭이 그 나름의 처세술을 설파하며 청년을 길들이는 대목이 있는데, 청년과 나의 차이점은 그는 엄청난 야망을 가졌어요. 나는 그냥 그저 내 한 몸 건사하며 살 서울의 집을 마련해 온전한 삶을 살고 싶어요.”
기자는 그의 슬픈 눈을 보며 이 시대 젊은이들의 방황을 생각해본다. 이웃 나라 중국에서는 요즘 청년실업률이 높아 야단이다. ‘귀경해서 농사를 지으라’는 당국의 말에 중국 청년들은 좌절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전세보증금 3억원 이하 주택을 구하는 직원에게 최대 3억원의 대출 지원을 하고 있다.
“회사가 있는 서울에서 3억원 이하 전셋집을 구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하잖아요. 집값이 뛰면서 쓸모없어진 제도죠. 고리오 영감의 이 대목이 생각나요.”
그는 기자가 들고 있는 책을 잠시 볼 수 있느냐고 묻더니 책을 들며 한 대목을 말한다. 달변가 보트랭이 라스티냐크를 감언이설로 꾀는 말인데, 요즘 세상과도 다르지 않아 기자도 놀랐던 이야기다.
‘이곳 파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출세하는가를 알고 있나? 천재성을 떨치든지 아니면 능수능란하게 타락해야 하네. 사회집단 속으로 대포알처럼 뚫고 들어가거나 페스트균처럼 스며들어 가야 하네. 정직이란 아무 소용이 없네.’
“네가 30세에 판사가 되면 연봉이 1200프랑이고, 평생 열심히 뛰고 더러운 짓을 마다하지 않으면 50대에는 꽤 잘나가는 변호사가 될 수 있겠지. 그런들 연봉은 5만프랑이지.”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한다는 건 환상이니, 자산가의 딸과 결혼하라는 말에 라스티냐크는 회의를 느낀다. 고리오 영감은 딸들이 찾아오지 않아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고 병상에서 혼자 죽어간다. 그렇지만 고리오 영감은 딸들을 매우 사랑해 자신에게 그들을 지원해줄 돈이 없는 것을 한탄한다. 그 가운데서 청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노인빈곤율 만년 1위인 대한민국과 사교육으로 찌든 세대의 모습을 닮고 싶지 않다고 절규한다. J는 ‘자신은 지방에서 상경해 고리오 영감 같은 비빌 언덕도 없다’고 한다. 19세기 초 유럽 사회와 경제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인 지금과 비슷하다. 변호사나 검사로 성공해서 부자가 되는 것보다 누군가의 재산을 물려받는 데에 집중하는 게 낫다는 현실 인식은 요즘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당시 자산 보유에 따른 수익은 5% 정도인데 요즘 회사채 금리가 딱 그 수준이다. J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영감님의 절규 어린 대사가 윗세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것 같아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대사가 여기 있네요.”
“내가 딸들을 지나치게 사랑했기 때문에 그 애들은 나를 사랑하지 못했어.”
“이 말이 오늘날과 비슷하다면 과장인가요?”
영감이 죽고 하숙집 청년은 청춘 시절에 흘려야 할 마지막 눈물을 고리오 영감의 무덤에 묻는다. 등불이 빛나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그는 외친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보트랭이 말한 것처럼 아무리 직업적으로 성공해도 부잣집 딸과 결혼하는 것보다 훨씬 못한 사회가 당시 파리였다. 능력주의가 근본적으로 부정되고 민주주의가 뿌리부터 위협받는 사회였다. 오늘날은 어떤 사회인가. J는 시골 친구들과 나눈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다.
“요즘 비교적 젊은 연배의 퇴직도 화제잖아요. 한편에서는 정년을 연장해 달라고 파업을 하는 분들도 있고요. 그건 세대를 대별하는 목소리예요. 젊은 친구들은 학력과 경력, 어학점수 같은 어느 세대보다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지만 취업도 쉽지 않고 좁은 취업문을 뚫은 내 또래도 ‘현실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죠. 봉급만 성실히 모았다가는 평생 집 한 채 마련도 할 수 없는 게 서울의 현실이잖아요.”
J는 한국은행에 초점을 두는 기사는 사양한다는 말을 하며 대신 요즘 젊은 층의 의식을 윗세대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놓치면 밀려오는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라는, 자신만 소외되는 상황에 대한 공포 불안심리가 젊은 층을 지배하고 있어요. 주식이나 부동산이나 비트코인에 대한 투자 광풍도 마찬가지죠. 올해 유난히 테마주가 강렬한 한국 주식시장은 그런 젊은이들의 욕구를 닮은 거울이죠. 최근 나스닥에 상장해 발행 주식의 1%만 거래된 베트남 주식 빈패스트오토를 보며 미국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베트남의 전기차 제조기업 빈패스트는 포모 현상을 대변한다. 9달러 수준의 주가가 93달러까지 오른 후 급락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물가 상승에다 점점 자산가격이 급등하자 불안해지고 이런 급등주를 찾는 데에 열을 올린다.
“나도 알아요. 한국은행 출신으로 긍지가 있어요. 각자의 생각과 판단은 존중돼야 한다고 봐요. 빈패스트오토 같은 밈 주식은 그냥 하나의 현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워요.”
기자는 그런 J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귀한 돈을 그렇게 어디다 던지면 안 되죠. 투자라는 것 자체가 돈을, 자본을 던진다는 의미잖아요. 돌아올 곳에 던져야 하지 않을까요?”
J는 기자에게 돌발적인 질문을 한다.
“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고 돈으로 계산되며 수치화되고 평가되는 사회가 되고 있어요. 영국에서 비싼 집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배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도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어요.”
독일 사회학자인 ‘돈의 철학’ 저자 게오르크 지멜은 화폐가 ‘물물교환→금속화폐→종이화폐’로 진화하면서 결국 ‘돈의 추상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J는 기자 앞에서 지멜의 말을 인용하며 말한다.
“우리 존재의 세계가 나의 표상이듯, 가치의 세계는 나의 욕망의 표출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주관적 욕망은 교환을 통해 객관적 가치로 되죠. 사물들이 교환을 통해 구체적인 질적 특성을 잃고 ‘돈’이라는 추상적 양으로 변하는 과정은 슬픈 대목이죠. 10,000원 숍의 각기 다른 물건은 구체적 사용 가치와 상관없이 그저 동일한 가격으로 슬프게 묶여 있습니다.”
기자는 J를 통해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청년맞춤형 주거 사다리를 놓는 방법은 없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 다음 기사를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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