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의 구원관은 나와 있지 않은 실제 성경
[[휴심정] 김형태변호사의 공동선]
“그러니 너는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셔라. 하느님께서는 이미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신다. 네 옷은 항상 깨끗하고 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여라. 태양 아래에서 너의 허무한 모든 날에, 하느님께서 베푸신 네 허무한 인생의 모든 날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겨라. 이것이 네 인생과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너의 노고에 대한 몫이다.”
뭐? 기분 좋게 술 마시라구? 머리에 향유 발라 멋도 내고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인생을 즐기란다. 참 멋진 말이로세. 성경에 이런 대목도 있다니.
얼마 전 성경을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 묵시록까지 통독했습니다.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대충 한번 살펴본 건데 코헬렛 9장 7,8,9절에 이런 대목이 나오더군요.
인권변호사 대부 이돈명 변호사님은 생전에 여유로운 삶을 사셨고 무엇보다도 술을 즐기셔서 나에게 이러곤 하셨지요. “여보게 자네, 내가 평생 마신 술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다 합치면 아마 뿔장 몇십 개는 채울 거네.” ‘뿔장’은 수영하는 풀(pool)장의 일본식 발음이지요. 변호사님은 소주를 사이다 컵에 부어 드시곤 했으니, 아이고 참 많이도 드셨겠네. 당신은 못 따라가지만 나도 술을 즐겨 친구 처들의 경계 대상 1호가 된 터라, 기분 좋게 술 마시라는 성경 구절에 눈이 번쩍 뜨이는 거죠. 코헬렛은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이라 소개되어 있지만 이 성경은 어느 특정인의 작품이 아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지혜문학 전통의 소산이라지요.
개신교 종편 TV를 보면 나오는 목사님들 마다 하나같이 내가 죄인이고 예수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설교를 합니다. ‘지금 여기’ 구체적 현실 속의 삶이나 공동선에는 관심이 없고 현세의 죄와 다음 세상을 기약하는 구원 이야기뿐입니다.
불교도 ‘지금 여기’의 현실을 부정하기로는 개신교 목사님들과 비슷하지요. 금강경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 그림자와 같고 이슬 같고 번갯불 같으니 마땅히 이처럼 보아야 하느니라.” 그렇게 이 현실이 꿈에 불과함을 바로 알면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이 현실이 그저 한낱 꿈이요, 아담의 원죄로 타락해서 십자가의 공로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할 그런 곳인가요? 구약성경 코헬렛도 세상에 불의가 득세하고 위로자 없는 억압이 만연하고, 늙음과 죽음이 닥치는 것을 보면서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탄식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주어진 삶의 기쁨을 누리고 최선을 다하라 하지요.
그런데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를 열심히 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복음에 나오는 당신 행적 전체가 바로 이 세상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선포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1,15) 영어 성경은 “하느님 나라가 우리 손에 있다(at hand)”라고 되어있더군요. 그 말씀 바로 뒤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하시는데, 회개하라는 건 하느님 나라와 정반대인 자기중심의 이기심을 벗어나라는 뜻이요,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된 소식을 잘 새겨들으라는 뜻입니다.
공관복음서의 스승님 가르침 어디에도 목사님들 설교 내용처럼 아담의 원죄나 타락한 이 세상에 대한 부정이나 십자가를 통한 구원 같은 내용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비록 불의가 판치고 이기심이 충돌하는 이 세상이지만 바로 지금 여기 하느님 나라가 이미 도래해 있다고 선포하신 것이죠. 당신은 타락한 이 세상, 허무한 이 세상이라고 도피하신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실현하자고 정면승부를 거신 겁니다. 그리고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여러 비유로 가르쳐 주셨죠.
‘하느님 나라는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나서 크게 가지를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단다. 또 누룩과 같아서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으면 온통 부풀어 오른단다.’
스승님께서는 이 땅에 도래한 겨자씨만한 하느님 나라가 온 세상에 크게 가지를 뻗게 하시려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시고 귀신 들린 이들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거라고 가르치셨죠. 또 하느님 나라는 ‘나’를 버리면 자연스레 드러나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 교회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들, 율법교사들이 남들을 가르치면서도 정작 자신은 자기중심, 위선, 교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꾸짖으셨죠. 결국 그들에게 미움을 사서 십자가형을 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이를 피하지 않고 끝까지 그 길을 걸으신 스승님.
나는 이번에 공관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이란 바로 이 허무하고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소식이라고, 기쁜 소식이라고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이 무어냐고 물으면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아담으로부터 받은 원죄 그리고 내가 지은 죄를 사하여 나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해 주시는 것”이라고 ‘정답’을 말하지요. 복음의 방점이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에서부터 내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바뀐 건데요. ‘나’를 버려야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인데 오히려 ‘나’의 구원을 구하고 있는 거죠.
나는 바오로 서간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앞뒤를 짐작해 보았습니다. 그 서간들에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라는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하느님께 다가서려는 걸 비판하면서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듯이 예수님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게 된다고 가르칩니다.(로마서 5,1-21) 이 서간들은 ‘하느님 나라 건설’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접한 적이 없는 바오로 사도 나름의‘예수님 사건’에 대한 해석이자 신앙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불가에서 말하듯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 그림자 같습니다. 코헬렛이 탄식하듯 불의가 득세하고 위로자 없는 억압이 만연하고, 늙음과 죽음이 닥치는 모든 것이 허무한 세상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듯 죄로 타락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고 하십니다. 그 하늘나라는 비록 악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겨자씨처럼 작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가 크게 가지를 뻗을 수 있게 스승님 먼저 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갈 일입니다.
그런데 많이 힘들겠지요?
글 김형태 변호사·<공동선> 발행인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간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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