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입증’ 용역 간담회…왜 제조사만 불렀나? [뉴스AS]
현대차 등 제조사 참석…피해자는 안 불러
강릉에서 티볼리 급발진 추정 사고가 발생한 뒤 공정거래위원회는 연구용역 하나를 발주했습니다. 소비자의 급발진 입증책임을 완화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는 내용을 담은 ‘제조물 책임법 운용 실태조사’입니다.
급발진은 운전자 의도와 무관하게 차량이 급가속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급발진은 십수년 전부터 논란이 됐지만, 소비자가 차량의 이상 급가속 현상을 발생시키는 결함을 증명해야 했기에 모두 운전자 과실로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지난해 강릉 급발진 사고로 인해 수년째 지지부진하던 제조물 책임법 개정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6월22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급발진 입증책임 전환 논의가 처음으로 진행됐습니다. 자동차 안전은 국토교통부가 책임지지만, 입증책임 전환과 관련한 제조물 책임법은 공정위 담당입니다.
이날 참석한 의원들은 ‘소비자가 급발진을 입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급발진 추정 사고를 추려 입증책임을 제조사로 넘겨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공정위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 9월께 연구용역이 마무리된다’며 확답을 피했습니다.
통상 정부 부처는 연구용역 보고서에 담긴 제안을 뼈대 삼아 정책을 만듭니다. 곧 마무리될 연구용역 결과에 많은 소비자와 전문가들의 관심이 쏠려있는 이유입니다.
관련 취재를 이어가던 중 한 달여전 연구용역과 관련한 간담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습니다. 지난 7월24일 서울역 철도공사 사무실에서 열린 비공개 간담회였습니다. 연구용역 연구진들이 전문가와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청취하는 자리였습니다. 회의는 공정위 소비자정책국 직원들이 진행했습니다.
이날 참석자를 확인해 차례로 접촉하며 그날 오간 이야기를 파악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릉 티볼리 사고의 담당 변호사이자, 이날 참석자인 하종선 변호사(법률사무소 나루)가 전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날 참석자 인적 구성이 너무 제조사 쪽에 편향돼있었다”고 했습니다.
참석자와 참석 기관을 확인해봤습니다. 하종선 변호사·김필수 대림대 교수(미래자동차학부)·최영석 한라대 교수(미래모빌리티공학)·현대자동차그룹·한국지엠·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옛 한국자동차산업협회)·자동차안전학회 등입니다. 하 변호사와 민간 전문가 2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완성차 업체 또는 자동차 산업을 대변하는 기관입니다.
하 변호사는 “통상 간담회를 하면 양쪽 입장을 동수로 맞추는데, 소비자 입장을 대변한 건 저와 김필수 교수 정도였다”며 “나머지 5~6명 모두 제조사 입장에서 또는 제조사에 유리하게 발언했다”고 했습니다.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현대차그룹 등 완성차 회사를 회원사로 둔 모빌리티산업협회뿐만 아니라 자동차안전학회도 제조사 입장을 동어반복 했다고 합니다. 이날 학회 소속 참석자는 김아무개 부회장이었습니다.
학회 누리집을 보면, 부회장단 8명이고 산·학·연 기관 소속 인사로 구성돼있습니다. 김 부회장 소속 기관은 ‘한국자동차산업협회’로 적혀있습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모빌리티산업협회가 올해 5월까지 사용한 협회명입니다. 자동차산업 협회 소속의 인사가 소속 기관의 이름만 달리해 참석한 겁니다. 그가 왜 제조사 입장을 되풀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특히 하 변호사는 이날 직접적인 이해당사자 가운데 제조사만 참석했다는 점에 큰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합니다. 급발진 이해당사자는 명확합니다. ‘운전자’와 ‘제조사’입니다. 그는 “자동차협회와 함께 제조사를 직접 불렀다면 급발진 피해자도 불러 의견을 들어야 형평성에 맞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비공개회의여서 굳이 양쪽 인원수를 맞춰야 할 필요가 없었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또 당일 참석한 최영석 교수는 소비자주권시민회의의 추천을 받아 참석했고, 소비자단체협의회도 참석 예정이었으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했다고 합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공정위 관계자는 “다양한 입장을 들어보려 노력했다. 소비자단체협의회로부터는 서면으로 의견을 받았다”며 “필요하면 공개적인 의견 수렴 과정도 마련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래도 뒷맛이 개운치는 않습니다. 급발진 피해자를 부르지 않았다는 하 변호사의 지적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공정위가 은연중에 급발진 피해자들의 주장은 신뢰도가 낮으니 변호사나 전문가의 필터링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제조사 의견은 협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청취한 것과 다르게 말입니다.
다시 지난 6월 국회 정무위 법안소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날 공정위가 의원들의 질의에 ‘해외 사례가 없고, 산업계 부담이 클 수 있다’고 답하자, 최종윤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지금 말씀하시는 것 보면 연구용역을 줬다고 하는데 연구용역이라는 게 다 (담당 부처가) 의도하거나 취지가 있는 것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연구용역이 나오나 마나지요”라고 했습니다.
공정위가 제조사 입장을 반복해서 언급하자, 최 의원이 공정위가 원하는 연구용역의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니냐고 꼬집은 것이지요.
이에 윤수현 당시 공정위 부위원장은 “연구용역은 방향을 딱 정해 놓고 하는 건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공정위는 이번 연구용역을 발주하며 “최근 급발진 사고, 소프트웨어 결함 등 신기술로 발생하는 사고에서 정보의 비대칭성 등으로 인해 소비자가 결함을 입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당초 취지답게 연구용역이 소비자를 위한 결론을 내어 비공개 간담회 때 하 변호사가 느낀 우려가 기우였음을 보여주길 바라봅니다.
안태호 기자 e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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