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전술’로 한미동맹 쟁취한 이승만… 왜?[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철통같은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으로 이어진 우리 각각의 양자관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며, 우리의 3자 관계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
“우리는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간 전략적 공조를 강화하고, 3국 안보 협력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굵은 글씨는 기자가 표시)
지난달 18일(현지 시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 정상이 발표한 공동성명(The Spirit of Camp David: Joint Statement)의 일부입니다. 한미일의 첫 정상회의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번 회의에서 3국 협력의 핵심 기반은 한미·미일동맹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 미국의 안보 보장을 바탕으로 국방비에 투입되어야 할 재원을 경제개발로 돌려 1970년대 고도 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죠. 실제로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1970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중은 남한(3.7%)이 북한(11%)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북한의 대규모 군비 지출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 수십 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한미동맹의 실체인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어떤 과정을 거쳐 체결되었을까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반공투사로 나아가는 과정을 다룬 4회(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30813/120687443/1)에 이어 5회는 예고해 드린 대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에서 그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한국 경시, 일본 중시의 美 동아시아 전략관
이는 미국이 19세기 개항 이후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시한 반면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낮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서기 위해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交通商條約)을 맺습니다. 고종은 이 조약의 제1조 거중조정(居中調停·Good offices) 조항(‘만일 각국이 일방 정부에 대해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타방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함으로서 우의를 표해야 한다’)을 조선이 외세의 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이 군사·외교적으로 도와준다는 뜻으로 확대 해석합니다(이하 유영익 <한미동맹 성립의 역사적 의의: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휘보 제128호, 2005 참고)
이에 따라 고종은 1885년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과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미국 정부에 거중조정을 거듭 요청했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존 셔먼 미 국무장관은 1897년 11월 19일 조선 주재 미국공사 앨런에게 “우리 정부는 한국의 국가 운명에 관계되는 문제에 대한 상담역이 될 수 없다. 또 한국과 어떠한 종류의 ‘보호 동맹’도 맺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합니다. 고종이 미국을 동맹으로 여기지 않도록 철저히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지시한 거죠.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배신’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러일전쟁 이듬해인 1905년 8월 4일 이승만은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납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입각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아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죠.
이에 루스벨트는 “정식 외교 경로로 문서를 제출하면 러일 강화회의 때 이를 내놓겠다”며 우호적으로 답하지만 그건 한낱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습니다. 이승만이 루스벨트와 만나기 5일 전 미국은 이미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를 인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이후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불이행을 틈날 때마다 언급해 도덕 외교에 호소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본 미국의 태도는 해방 이후에도 유지됩니다. 6.25 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6월 미군의 남한 철수가 대표적입니다. 이미 1947년 후반부터 미 군부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면서 주둔비용 부담을 들어 조기 철군을 주장한 데 따른 겁니다(이하 김일영 <이승만 정부에서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 북진 반일정책과 국내 정치경제와의 연계성> 국제정치논총, 2000 참고) 당시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 위협을 들어 미군 철수를 강하게 반대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이에 그는 대안으로 상호방위협정 체결을 요구하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죠.
6.25 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된 1950년 1월의 ‘애치슨 라인’ 발표도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은 태평양 방위구역선에 일본과 필리핀을 포함하면서 한국과 대만은 제외합니다. 이는 김일성과 스탈린이 전쟁을 계획하면서 남침 시 미국의 개입이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오판한 근거가 됩니다.
미국이 상호방위조약 체결 꺼린 이유
대외관계에서 개입과 고립을 오간 미국의 외교 전통도 한몫했습니다. 1823년 먼로 독트린으로 유럽에 대해 고립주의 외교를 천명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개입으로 급선회합니다. 하지만 늘 실리를 따지는 미국답게 과도한 개입을 통한 군비 확장 등의 비용은 경계하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체코 등 중부 유럽을 점령한 미군을 철수시킨 게 대표적입니다(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까치, 2016 참고) 당시 처칠 영국 총리는 얄타 회담 이후 노골화된 스탈린의 팽창주의에 맞서려면 미군의 유럽 철수를 최대한 늦춰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과의 갈등을 피하고 국민들의 철군 여론을 충족시키기 위해 철수를 단행합니다.
양자동맹의 근간인 현실주의 외교에 대한 미국의 혐오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사국 누구도 예상치 못한(그리고 누구도 원하지 않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미국은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현실주의 외교를 혐오하게 됩니다(이하 헨리 키신저 <Diplomacy> 2013 참고)
대신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통한 국제평화를 추구하면서 집단안보를 통해 공동의 적에 대응하는 자유주의 접근을 선호하게 되죠. 이에 따라 미국은 양자동맹을 통한 세력균형이라는 유럽 대륙의 전통적인 안보 보장을 기피하게 됩니다. “내가 아는 한 미국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시대 이래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일이 없다”는 1949년 5월 초대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의 발언이 나온 배경입니다.
승부사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
이승만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북진통일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당시 북한과 상대가 되지 않은 남한의 군사력에 비춰보면 허황된 발상이라는 반발을 사죠. 하지만 그의 북진통일론은 국내 정치 목적과 대미 외교용의 두 가지 포석을 노린 전략이었다는 게 최근 학계의 평가입니다. 국내 정치 측면에서는 당시 한독당 등이 주장한 남북협상론에 대응해 국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겁니다. 동시에 미국에 대해서는 미군 철수를 늦추거나, 철수에 따른 안전보장을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높였다는 거죠.
무엇보다 6.25 전쟁 이후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이 미국을 움직이는 데 크게 이바지합니다. 그의 승부사 기질은 북중 연합군과 유엔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2년 3월부터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그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만이 한국인들에게 휴전을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만약 미국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한국군은 단독으로라도 북진 통일에 나서겠다고 위협합니다. 중공군 참전에 따른 전사자 급증으로 반전 여론이 강해진 미국은 휴전 등 출구전략을 모색 중이었는데, 이승만의 발언에 적지 않은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아이젠하워 집권 직후인 이듬해 5월 브리그스 주한 미국대사가 상호방위조약 대신 한국군 증강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이승만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유엔군을 철수시켜도 좋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며 재차 미국을 압박합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그해 6월 6일 휴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필리핀과 맺은 조약에 준하는 방위조약 체결 협상 개시를 통보합니다. 아이젠하워의 양보에도 이승만은 더 강하게 밀어붙이죠. ‘미군 주둔’을 규정한 미일 안보조약 수준의 강력한 방위조약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치열한 이데올로기 선전의 각축장이었던 반공포로 이슈에서 이승만의 독단적인 결정에 직면한 미국 정부는 극도의 분노에 휩싸입니다.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는 작전계획(Plan Ever-ready) 실행까지 검토할 정도였죠. 하지만 결국 미국은 다시 한번 물러섭니다.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서울로 급파해 상호방위조약 체결 협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겁니다.
당시 로버트슨은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shrewd) 지략이 뛰어난(resourceful) 인물이다. 그는 한국을 국가적 자살행위(national suicide)로 몰고 갈 수 있는 광적인 인물(fanatic)이지만 회유와 압력을 통해 협력을 얻어내는 게 가능하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버트슨이 제시한 조약 초안에 한국이 무력 공격을 당할 경우 미국의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조항이 빠진 사실을 지적하면서 다시 한번 미군 주둔을 허용한 미일 안보조약 수준의 안보 공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비대칭 동맹조약에서 약소국의 ‘방기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였죠.
결국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수용합니다. 로버트슨은 본국 훈령을 받아 한국 내 미군 주둔 조건을 수용하기로 하고, 대신 한국군의 단독 행동 포기와 휴전 협조를 이승만에게 요구합니다. 이와 함께 전후 복구를 위한 경제 원조와 한국군 전력 증강 등을 약속하죠. 이승만이 그토록 원한, 대한제국 시절부터 숙원이었던 미국과의 동맹조약이 사실상 이뤄진 순간입니다.
이승만이 줄기차게 강조한 미국의 자동 개입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제4조의 미군 주둔 조항(‘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을 통해 사실상 달성됩니다. 주한미군의 ‘인계철선(引繫鐵線)’ 기능을 통해 유사시 미국이 자동으로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죠.
미군 주둔 조항이 독립국의 주체성과 자존심을 침해했다는 진보 진영의 비판도 있지만, 사회주의 양대 강국이던 소련,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의 침략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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