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⓷] 현대인의 불안심리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수작
행복한 가정이 파괴당할 수 있다는 불안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호러는 신인감독이 도전하기에 좋은 장르다. 적은 예산으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데 호러만큼 적합한 장르가 없다. 실제 세계적 거장 올리버 스톤 감독은 15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1974년 직접 각본, 연출, 편집을 맡은 ‘강탈’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는 과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 기자들과 인터뷰를 통해 “신인감독이 적은 예산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담아내는데 호러 장르가 안성맞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유재선 감독 역시 48억원의 많지 않은 제작비로 ‘잠’을 통해 독창적 능력을 발휘했다.
평화로운 신혼부부의 집. 출산을 앞둔 수진(정유미)은 대기업 유통 업체에 다닌다. 남편 현수(이선균)는 짧은 분량으로 TV에 가끔씩 얼굴을 내비치는 단역배우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외벌이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날, 현수는 자다 일어나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누가 들어왔어“라고 말한다. 깜짝 놀란 수진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다음날 현수는 자다가 냉장고 문을 열고 날생선과 날고기를 우적우적 씹어먹는가 하면, 잠결에 얼굴을 마구 긁어 피를 철철 흘린다.
‘잠’은 현대인의 불안심리를 호러 장르로 신선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사는 “누가 들어왔어”이다. 평화로운 신혼집에 과연 ‘누가’ 남편의 몸으로 들어왔을까. 영화는 ‘빙의’를 보여주는 듯 하지만, 딱 부러지게 설명하지 않는다. 과연 현수의 몸에 죽은 ‘누군가’가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국 토속신앙의 전통을 감안하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유재선 감독은 그 경계선 위에서 불안을 자극한다.
또 하나의 핵심 키워드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것이 없다’는 가훈 아닌 가훈이다. 현수는 얼굴을 긁었다가 상처를 입어 출연하던 작품에서 하차한 뒤 실업자로 지낸다. 게다가 잠결에 이상행동까지 해대니 출산을 앞둔 수진은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아래 집에 거주하는 한 여성은 “이혼은 별거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럴수록 수진은 악착같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애를 쓴다. 관객 입장에서 남편과 헤어지지 못하는 수진의 결심을 의아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 가훈은 역설적으로 수진의 불안을 더욱 더 자극한다. 함께 하는데도 사태가 악화되니까.
라스트신은 열린 결말이다. 현수의 몸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의 전반부는 수진의 공포를, 후반부는 현수의 공포를 다룬다. 전반부에 현수가 폭주한다면, 후반부엔 수진이 극한으로 치닫는다. 정체 모를 ‘누군가’가 현수의 몸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부부는 전속력으로 부딪힌다. 도무지 알수 없는 외부의 검은 그림자가 행복한 우리 가정, 그것도 갓 아기를 낳은 신혼부부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불안감. 영화 ‘잠’이 선사하는 악몽이다.
Copyright © 마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