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덕·철덕·집덕… ‘덕후 지식인’ 시대

박동미 기자 2023. 9. 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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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 덕질’ 로 책 펴낸 4인 “내가 지식쌓는 이유는…”
게티이미지뱅크

취미로 시작한 관심 분야를 높은 수준의 지식으로 엮어낸 ‘덕후’들의 책이 주목받고 있다. 이들은 학계에 속하지도, 직접 관계된 일을 하지도 않지만, 학자나 업계 전문가에 버금가는 연구서나 학술서를 써내며 출판 시장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른바 ‘아마추어 연구자’이자 ‘시민 지식인’.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덕후들의 저술이 예술 분야 감상 수준을 벗어나 사회 문제나 역사 해석 등 인문학적 깊이를 요구하는 ‘하드’한 영역으로 옮겨가는 추세”라면서, “해당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기성학자보다 과감하게 접근하는 특징이 있다”고 분석했다.

출판계는 반색한다. ‘철도 덕후’ 전현우의 ‘오송역’을 기획·출간한 이김의 김미선 편집자는 “교통 정책 연구보고서지만 ‘철덕’의 애정이 느껴지는 남다른 글쓰기가 매력적이라고 판단했다”면서 “덕심 있는 저자를 발굴하는 게 요즘 가장 눈에 띄는 출판계 경향이다”라고 전했다. ‘밀덕(밀리터리 마니아)’ 권성욱의 ‘별들의 흑역사’를 펴낸 교유서가 신정민 대표는 “‘그들만의 리그’에 있는 학자보다 책과 독자 사이 가교역할을 톡톡히 해낸다”면서 “덕후 저자들의 저술 활동으로 출판시장 활력과 새로운 논객의 등장까지 기대해봄 직하다”고 평했다.

‘철도 덕후’는 교통 연구자로, ‘밀덕’은 전쟁사 연구자로, ‘아파트 덕후’는 재건축 현장 전문가로…. ‘공부 덕후’는 어떻게 시민 지식인이 되는가. 덕질을 더 잘하려고 공부하고, 공부하는 자체가 다시 덕질이 된, 최근 주목받는 네 명의 ‘공부 덕후’ 저자들을 만나봤다.

■ ‘전쟁사 덕후’ 권성욱
원서 읽기위해 3개국어도 연마
“공무원 업무지장? 오히려 도움”

◇‘밀덕’에서 전쟁사 연구자로… “덕질하다 4개국어 능통” = 최근 세계의 무능한 패장 12명의 이야기를 담은 ‘별들의 흑역사’(교유서가)를 펴낸 권성욱(47) 씨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군 관련 일을 하지도 않지만, 전쟁사 관련 손꼽히는 저자 중 한 사람이다. ‘별들의 흑역사’는 세 번째 저서로 영웅을 주로 다뤄 온 기존 전쟁사 책들과 달리, 패자에 집중한 새로운 관점으로 눈길을 끈다. 전작인 ‘중일전쟁’은 국내 최초로 중일전쟁을 다룬 역사서로 주목받았고, ‘중국 군벌 전쟁’(이상 미지북스)은 ‘근대판 삼국지’라는 평을 받았다.

권 씨는 온라인 군사·역사 블로그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밀덕’이다. 여기서 권 씨는 자신과 같은 덕후나 역사 전공자, 교수 등 다양한 회원과 정보를 교환하고, 때로 논쟁도 한다. 학계 경향을 놓치지 않으려고 꾸준히 논문도 읽는다.

그는 원어로 된 역사서를 읽기 위해, 즉 ‘덕질’을 더 잘하려고 연마한 일어, 중국어, 영어 실력도 출중하다. 자연스럽게 전쟁사 서적 번역도 하고 감수도 보게 됐다. “초등학교 때 ‘삼국지’를 읽은 후 취미는 오직 역사책뿐이었다”고 말하는 권 씨지만, 전공도 직업도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공대를 나온 권 씨는 현재 한 광역시 공무원. 틈만 나면 독서삼매경이 되는 그에게 업무 지장을 물으니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그는 “역사 공부는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과정이어서 모든 직업에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며 동참을 권했다.

최근 러시아 붉은 군대와 독일 나치군의 격전을 다룬 ‘베를린 함락 1945’의 감수를 맡기도 한 그는 “강대국의 역사에 대한 책은 많다. 앞으로 2차대전에 휘말린 약소국의 역사에 대해 써보고 싶다”고 했다.

■ ‘철도 덕후’ 전현우
전공 철학, 교통 연구에 덧입혀
“밥먹고 철도생각만…덕심 맞아”

◇‘철도 덕후’가 철학을 하면… “내가 불편해서 파고들었죠” = 2020년 ‘거대도시 서울철도’(워크룸프레스)로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저술상을 받은 전현우(37) 씨는 정부나 지자체의 철도 정책 자문위원으로 참여할 정도로 그 깊이와 연구성과를 인정받는 ‘교통 연구자’다. 특히 사회적 문제를 철학적 사유로도 연결하는 걸로 정평이 나 있는데, 이는 전공인 철학에 철도를 향한 ‘덕심’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전 씨에게는 서울시립대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원이라는 직함이 있지만, 실질적 생업은 따로 있다. 그는 철학·철도·자연과학 어느 것과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귀띔했다.

최근에는 표지부터 기개가 넘치는 ‘오송역’(이김)을 펴냈다. 제목과 저자명에 절반을 할애한 독특한 디자인. ‘이상한 분기역의 비밀과 오차 수정의 길’이란 부제가 붙은 책은 KTX 오송역이 왜 ‘실패작’인지 조목조목 따지는 연구 보고서다. 그가 20대 초반부터 대중교통, 특히 철도에 마음을 빼앗긴 데는 개인적인 이유가 크다. “인천 집과 서울을 오갈 때마다 열차 지연도 잦고, 불편하고 이상했어요. 철도망이 거대한 부조리로 느껴져 질문하기 시작했죠.” 전 씨는 “주변에서 자꾸 ‘철덕(철도 덕후)’이라 부르는데, 밥 먹고 철도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면 맞는 말이다”라며 웃었다.

철도에 대해서라면 “모든 역에 대해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전 씨. 다음은 삼남(충청·전라·경상) 지방 철도망에 대한 책을 준비 중이다.

■ ‘아파트 덕후’ 이인규
광고회사 다니다 논문 내고 이직
“이젠 다른 덕질 찾아 공부할것”

◇‘아파트 덕후’가 고향을 파면… “덕질이 논문되고 직업도 바꿔” = “교수님이 덕질처럼 하라 하셨어요.” 고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 밑에서 석사 과정을 밟은 이인규(41) 씨. 둔촌주공아파트 40년 역사를 건설·거주·재건축 세 가지 관점에서 관찰·기록한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마티)는 ‘덕질’에서 시작된 책이다. 그는 현재 건축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대학에서 건축이나 도시계획을 전공하지 않았고,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광고회사를 다녔다. 하지만 ‘집’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아파트 덕후’들과 교류하며 주거환경에 대해 연구자 수준으로 ‘팠다’.

이 씨의 첫 ‘덕질’ 대상은 자신이 나고 자란 ‘둔촌주공아파트’. 그는 10여 년 전 석사 논문이자 책의 바탕이 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재건축을 앞둔 ‘고향’을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파트 덕후’의 ‘구루’(스승)로 불리던 박 교수와 인연이 닿았다. 이 씨는 “아파트를 건축, 도시, 정치, 경제와 연결해 보고 싶었는데, 교수님 덕에 공부가 결국 덕질임을 알고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덕후 스승’은 “네 멋대로 덕질하라”며 응원했고, 그 결과 건축·사회학·인류학을 넘나드는 흥미로운 연구서가 나왔다.

이 씨는 이제 그리움과 애정, 호기심이 뒤섞인 ‘둔촌’을 보내줄 생각이다. 논문과 책, 그리고 이직에까지 영향을 준 둔촌과의 인연을 에세이를 통해 회고한 후 정리하려 한다. “그만 이별해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덕질 대상을 찾아서, 또 공부해야죠(웃음).”

■ ‘모차르트 덕후’ 이채훈
방송PD 일하며 국내첫 평전 내
“50년 걸쳐 쓴 셈…성덕 꿈 이뤄”

◇국내 저자 최초 모차르트 평전… “이제야 ‘성덕’됐다” =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방송국 PD로 일했던 이채훈(64) 씨는 국내 저자 최초로 모차르트 평전을 쓴 ‘모차르트 덕후’다.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는 이 씨는 모차르트에 관한 한 ‘덕력 50년’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무려 800쪽에 이르는 ‘모차르트 평전’(혜다)은 50년에 걸쳐 쓰인 것과 다름없다.

전문가들은 영어·독일어 번역서 위주였던 서양 음악가 평전을 한국인 연구자가 시도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또 비전공자인 이 씨가 음악 감상문 수준의 산문이 아니라, 예술가의 삶과 업적을 전문적이면서도 시대적 통찰을 갖춰 해석·평가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책은 모차르트의 ‘죽음’과 관련한 최신 연구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는데, 이는 저자가 학계의 동향을 꾸준히 파악하며 공부했다는 방증이다.

“클래식 애호가뿐 아니라 연주자들과 음악사 연구자들에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과거 대중적인 클래식 교양서를 출간한 바 있는 이 씨는, 이번에 평전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좋아하는 ‘덕질’을 관련 업계와 학계에까지 귀감이 되는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성덕(성공한 덕후)’의 꿈 아니냐고 이 씨는 전했다. “단순히 모차르트 책, 음악서가 아니라 거짓과 무례가 판치는 시대에 세상을 보는 눈,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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