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의 위기, BBC는 무엇이 달랐나

영국 BBC와 HBO가 공동 제작한 드라마 〈이어스 앤드 이어스(Years and Years)〉는 브렉시트 이후 2019년부터 2034년까지 영국 사회에 벌어질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렸다. 극우 정치인이 득세하고 은행이 도산하며 미·중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매해 벌어지는 ‘멸망 시나리오’ 가운데 한 장면으로 BBC 폐쇄가 묘사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정부가 BBC에 제공하는 모든 공적 자금을 중단했다면서 뉴스 앵커는 이렇게 전한다. “이로써 BBC는 오늘부로 문을 닫습니다. 모든 방송을 중단합니다.” BBC 폐쇄는 영국 사회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암울한 장면인 셈이다.
한국에서도 BBC는 공영방송을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한다. 정치적 독립성과 양질의 콘텐츠를 모두 확보한 공영방송의 롤모델이라는 이야기다. ‘언론 장악’ 의혹을 받는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도 7월28일 “대한민국에도 BBC 인터내셔널과 NHK 국제방송처럼 국제적 신뢰와 인정을 받는 공영방송이 있어야 한다”라고 밝혔다. 공영방송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정부·여당은 공영방송의 공적 재원인 TV 수신료를 분리 징수하는 안을 넉 달 만에 강행했다. 보수언론은 공영방송의 대표 주자인 BBC마저 수신료 폐지를 검토한다며 국내 수신료 삭감 여론에 불을 지핀다.
BBC를 문화 자산으로 여기는 영국에서 어쩌다 수신료 폐지를 논하게 되었을까. 공영방송이 마주한 여러 겹의 위기를 BBC는 어떻게 타개하고 있을까. 영국 사회의 고민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영국에 기반을 둔 ‘공영미디어연합(Public Media Alliance·PMA)’은 그 고민을 앞서 시작한 곳이다. 1945년 설립된 비영리단체로 영국 BBC·미국 PBS·독일 ZDF 등 전 세계 51개 공영방송사를 회원으로 두고 있다. KBS도 그중 하나다. 지난 6월22일 공영미디어연합에 소속된 세계 8대 공영방송사 대표 협의체(GTF)는 한국의 수신료 분리 징수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방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 KBS는 재정적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고 공영방송의 기반 자체가 위험해질 것이다.”
해외 공영방송 사례를 국내와 바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영국의 경우 BBC 수신료가 연 159파운드(약 27만원)로 전체 재원의 70%를 차지하는 데다(KBS는 40% 비중이다) 회사 규모도 훨씬 크다. 하지만 공영방송이 처한 위기는 닮았다. 수신료 폐지론, 편향성 시비, 보수 정부의 민영화 압박은 BBC도 겪는 문제다. 공영미디어연합의 해리 록 편집장은 8월18일 〈시사IN〉에 “다행히도 이러한 질문을 고려하고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 BBC에는 있다”라고 말했다. 록 편집장은 영국 민영방송 LBC에서 프로듀서로, 뉴질랜드 공영방송 RNZ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전 세계 공영미디어 관련 정책을 모니터링한다. 유사한 위기를 다르게 풀어가는 영국의 해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영국 정부가 BBC 수신료를 동결하고 2028년까지 폐지 절차를 밟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먼저 영국에서 수신료 폐지가 결정된 적이 없다는 점을 말씀드린다. BBC 수신료 폐지안은 나딘 도리스 영국 문화장관이 지난해 1월 제안한 것이다. 2024년까지 수신료를 연 159파운드로 동결하고 2028년부터 폐지할 수도 있다는 의견인데, 후임자인 루시 프레이저 장관이 이 기조를 유지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물론 TV 수상기마다 요금이 부과되는 점, 영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인 요금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수신료 제도는 낡은 형태로 간주된다. 이는 합리적인 비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신료 폐지가 특정 유권자층에게 인기가 없는 BBC의 재정적 상황을 (보수당 정부가)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노동당 예비내각 문화장관인 루시 파월 의원은 수신료 폐지에 대해 “보수당이 BBC 저널리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훌륭한 영국 언론기관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BBC를 협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신료 변경을 추진한다는 여론이 있다. 다행인 점은 정부와 의회가 수신료의 대안을 검토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는 점이다(BBC의 법적 의무와 권한을 명시한 칙허장이 갱신되는 2028년까지 5년이라는 기한을 두었다. 영국 하원에서 BBC 공적 재원 구조를 논의한 결과를 바탕으로 수신료 개편 여부가 결정된다). 다가올 변화에 대해 공영방송이 계획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부여받는 것은 중요하다. 수신료를 폐지하는 대신 부가가치세로 자금을 충당하기로 한 프랑스나, 분리 징수가 시행된 한국에서 보듯이 갑작스러운 재원 구조 변경은 공영방송을 불안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방송 서비스를 유지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역량에도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신료 대안으로 어떤 것이 검토되고 있나.
지난해 영국 하원 디지털·문화·미디어·스포츠 위원회가 제안한 가구 부담금이 있다. 독일 공영방송의 재원 조달 방식과 유사하다. TV 보유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가구가 일정 요금을 내는 것이다. 영국이나 한국처럼 TV 수상기마다 수신료가 책정될 경우에 시청자들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온라인으로 BBC 콘텐츠를 이용하는데도 (TV가 아니기에) 수신료를 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구당 수신료가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몇 가지 질문이 뒤따른다. 요금은 어떻게 징수할지, 금액은 누가 정할지, 소득이나 재산에 따라 차등 부과할지, 납부 거부권이 있을지 같은 질문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질문을 고려하고 토론할 시간이 있으며, 이는 필수적이다.
대안을 찾는 입법자들이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보장하고 지속 가능해야 한다. 둘째, 각국의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 한 국가에서 효과가 있다고 해서 다른 국가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는 정부 예산으로 직접 공영라디오 방송에 자금을 지원한다. 뉴질랜드처럼 공영방송에 대한 광범위한 정치적 합의가 있을 때 효과적인 모델이다. 핀란드는 특별세를 통해 공영방송에 자금을 지원한다. 고임금과 높은 세율이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작동할 뿐, 조세 저항이 강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BBC 보도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수신료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은 한국과 유사해 보인다. 공영방송이 정치적 입김에 좌우되기도 하는데.
의심할 여지 없이 전 세계 공영방송은 점점 더 많은 공격을 받고 있으며 각국 정부는 공영방송의 운영을 통제하고 간섭하려 한다. 이탈리아의 공영방송 RAI나 이스라엘의 KAN만 봐도 그렇다(이탈리아는 극우정당 집권 후 공영방송 장악 시도로 RAI 사장이 지난 5월 사임했고, 이스라엘 극우 연정은 7월 공영방송 KAN의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다만 BBC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 보기는 어렵다. 부분적으로 영국의 정치 역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BBC를 중심으로 한 세기에 걸쳐 정치적 간섭을 막기 위한 견제와 균형이 구축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까운 예로, 2020년 보수당 기부자 리처드 샤프가 BBC 이사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자리는 정부가 임명하는 자리다. 하지만 샤프 회장이 보리스 존슨 전 총리에게 대출을 알선해준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BBC 기자들은 여타 매체 못지않게 이 사건을 추적했다. 그들 스스로 책임을 묻고자 했다. 결국 샤프 회장은 지난 4월 자진 사임했다. 특정 주제를 보도할 때의 논조나 BBC 기자가 던진 특정 질문에 관해 정파적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지만, BBC가 여전히 독립성을 치열하게 지키며 두려움이나 호의 없이 보도해야 할 책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공영방송의 롤모델로 꼽히는 BBC에서도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BBC는 영국 미디어 환경과 영국의 문화적 의식에서 매우 중요한 기관이라 상당히 높은 윤리적 기준을 적용받는다. 그런 까닭에 종종 좌파와 우파 단체로부터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는 비판을 듣는다. 좌파와 우파가 모두 불만족스러워한다고 해서 공영방송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해석하긴 어렵다. 건설적인 비판과 내부 성찰을 무시하는 태도라 생각한다. 문화적 기관으로서 BBC가 다른 기관보다 더 높은 기준에 따라 분석하고 면밀히 조사하는 저널리즘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BBC는 수신료 개편의 대응책으로 보도 부문 인력을 감축했는데.
2022년까지 BBC 보도 부문의 450여 개 일자리를 없애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BBC 인력 감축은 궁극적으로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하나는 수신료 동결로 인한 재원 삭감이고 또 다른 요인은 ‘디지털 퍼스트’ 조직으로의 전환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전통적인 콘텐츠에서 디지털 중심으로 인력 자원을 재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예산 삭감은 장기적으로 탐사 저널리즘의 양과 질에 필연적으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BBC는 영국에서 탐사 보도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제작하는 방송사 중 하나다. ‘BBC 베리파이(BBC Verify)’라는 팩트체크 플랫폼을 출시해 이러한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공영방송에 대한 여론은 여전히 냉담하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공영방송이 그 가치와 역할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전 세계적으로 공영방송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결국 미디어 리터러시의 문제다. 현재 공영방송들이 캠페인을 통해 공영 미디어가 사회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에 왜 중요한지 대중에게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다. 하지만 이것이 언론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을 돌이켜보면 공영방송의 주요 경쟁자는 국내 민영방송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민영방송뿐만 아니라 글로벌 스트리밍 대기업, 소셜미디어, 심지어 게임 플랫폼까지 경쟁 상대다. 시청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공영방송사는 이제 이들과 경쟁하면서도 자신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정당화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은 셈이다.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짜뉴스와 허위 정보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다. 공영방송은 공정하고 사실에 바탕을 둔 뉴스와 저널리즘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에 기반해 이를 수행한다. 또 공영방송은 소외된 커뮤니티를 포함해 모든 사회구성원이 접근할 수 있는 뉴스와 콘텐츠를 만들 의무가 있다. 많은 국가에서 공영방송은 소외된 커뮤니티의 유일한 정보원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SBS는 다양한 민족 커뮤니티를 위해 60개 이상 언어로 콘텐츠를 제공한다. 나미비아의 NBC는 11개 라디오 방송국에서 원주민 언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민영방송에서는 하지 않는 서비스들이다.
OTT를 통해 양질의 콘텐츠를 볼 수 있는데 왜 굳이 공영방송에 세금을 내야 하는지 묻는 의견도 있다.
신뢰할 수 있는 공적 재원은 정치적·상업적 이익보다 대중에 대한 책임을 높이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은 수익성이 아니라 사명에 의해 운영된다. 어떤 콘텐츠를 제작할지가 수익성보다 공적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공영방송은 국영방송과도 다르다. 국영방송은 사회의 필요보다는 정부의 목표에 봉사한다는 사명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때로 허위 정보를 확산시키고 권력을 옹호하기도 한다. 수신료 대신 스트리밍 구독료를 지불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다. 해당 플랫폼이 지역 라디오와 뉴스를 제공하는가? 모두를 위한 다양하고 대표성 있는 콘텐츠를 가졌는가? 위기나 응급상황에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가? 정치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공영방송은 사회적 가치가 크다. 그것이 영영 사라질 때까지 사람들이 자기가 무엇을 가졌는지 깨닫지 못할까 두렵다.

김영화 기자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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