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종교는 교실 밖으로…100년 된 프랑스 세속주의 전쟁
1905년 정교분리 원칙 수립 후 가톨릭·이슬람 상징물 금지 강화
(파리=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프랑스 공립학교 내에서 4일(현지시간)부터 이슬람 여성들이 입는 긴 드레스 '아바야'의 착용이 금지됐다.
일부 좌파 진영과 여성 단체에서 '이슬람 혐오'를 부추기는 조치라는 비판이 일었지만 일단 큰 충돌 없이 정부 조치가 시행에 들어간 모습이다.
가브리엘 아탈 교육부 장관은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 '엑스(X·옛 트위터)'에 "교직원들의 헌신 덕분에 아바야와 카미(무슬림 남성이 입는 긴 옷)에 대한 저의 조치가 오늘 아침부터 큰 문제 없이 존중되고 있다"며 "학교는 공화국 규율 안에서 예외 없이 모든 학생을 환영한다"고 적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부터 '아바야'를 입고 등교하는 사례가 늘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세속주의에 어긋난다며 이번 학기부터 공교육 기관 내 아바야 착용을 금지했다.
일간 르몽드에 따르면 프랑스 공교육 기관에서 종교적 상징물이 금지된 역사는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에는 제3공화국 시기인 1882년 의무 교육이, 1905년엔 정교분리(종교와 국가 분리) 원칙이 도입되면서 공교육 기관 내 세속주의가 중요 가치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프랑스 교육에서 세속주의는 종교적 이념은 물론 이와 연관된 정치적 주장까지 배제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학교 내 세속주의는 여러 차례 시험대에 올랐고 그때마다 정부는 새로운 공문과 법으로 세속주의를 강화해 왔다.
학교 내 정치 선전물에 대한 첫 번째 금지 공문이 나온 건 1936년이다.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 프랑스는 공화주의를 옹호하는 측과 가톨릭 왕정주의·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쪽으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이런 분열은 젊은 층에까지 퍼져 학교에서도 당파적 선호를 두고 긴장과 싸움이 이어졌다.
이에 장 자이 당시 교육부 장관은 "학교는 인간들의 다툼이 침투하지 못하는 불가침의 성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며 1936년 12월 31일 교내 정치 선전을 금지하는 공문을 발표했다.
장 자이 장관은 당시 극우 가톨릭 우파가 교내 종교 상징물의 설치를 주장하고 나서자 이듬해 5월 '종파 선전'도 금지하는 공문을 다시 내려보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기간에 나치와 협력했던 비시 정권은 제3공화국이 세운 원칙들을 무너뜨렸다. 학교를 비롯한 공공장소에 십자가가 다시 설치됐고, 이는 2차 대전이 끝난 뒤에야 철거됐다.
20세기 후반 들어 이슬람권 출신 이주자가 늘어나면서 교내 세속주의 논쟁은 가톨릭 종교에서 이슬람 종교로 옮겨갔다.
이슬람 상징물이 처음 논쟁 대상으로 떠오른 건 1989년이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무슬림의 히잡 착용을 학교 측 재량에 맡겼는데 그해 가을 크레이 지역의 한 중학교에서 무슬림 청소년 3명이 수업 시간에 히잡을 벗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학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문제는 곧장 정치적 이슈로 번졌고, 그해 11월 27일 프랑스 최고행정법원인 국참사원은 "과시적"인 성격의 종교적 상징물은 금지한다면서도, 히잡 착용이 세속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학교장이 사안별로 판단하라는 모호한 결론을 내렸다.
히잡 논란은 2002년 리옹의 한 여고생 사건으로 다시 불거졌으며, 이후 프랑스 정부는 2004년 3월 공립 학교에서 학생들이 표면적으로 종교적 소속을 나타내는 표식이나 복장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기에 이른다. 무슬림의 히잡뿐 아니라 유대교의 전통 모자인 키파나 가톨릭의 대형 십자가 등도 금지 대상에 포함됐다.
이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인 2011년 당시 뤽 샤텔 교육부 장관은 자녀의 등하교에 동행하는 엄마들의 히잡 착용까지 금지하겠다고 발표하고 이듬해 관련 지침을 공문으로 내려보냈으나 국참사원의 제동에 걸린다.
2019년 2월 에리크 시오티 공화당 의원(현 공화당 대표)이 이에 관한 입법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번에 정부가 교내 착용을 금지한 '아바야'의 경우 그동안은 검소한 복장에 대한 이슬람교 신념에 맞춘 긴 드레스로 여겨져 '회색지대'에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아바야'가 세속주의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정부는 '아바야' 역시 종교적 색채를 띤 복장이라며 금지 방침을 밝혔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1일 한 직업 고등학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공화주의 체제를 무시하려는 시도가 많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는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며 세속주의 원칙을 강화할 뜻을 드러냈다.
s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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