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재나 고궁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경복궁’. 긴 시간 동안 서울의 중심을 우직하게 지켜온 경복궁은 한국인에게는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한국사의 중심지다. 세계 각국의 외국인은 물론 한국인들도 사계절 내내 찾는 경복궁에서 한정 기간 동안 특별한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바로 경복궁의 끝자락, 가장 안쪽에 숨겨진 ‘건청궁’ 특별 개장이다. 건청궁은 경복궁의 화재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가 생활하던 궁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 2017년 특별 개장 이후로 6년간 문을 닫았던 건청궁이 오는 18일까지 다시 문을 열고 있다.
건청궁 외부만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명성황후와 고종이 생활하던 공간을 직접 관람하고 즐기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다만 관리 보존과 안전상의 이유로 딱 한 달 동안만 구경할 수 있다. 이후 재개방 계획은 아직 미정이기 때문에 놓치기 전에 얼른 방문해 보자.
현재 광화문 앞은 월대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국립 고궁 박물관 옆 출입구로 입장하는 걸 추천한다.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 5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금세 도착한다. 건청궁 관람 자체는 무료지만, 경복궁 입장권은 개별로 구매해야 한다. 고궁 박물관 쪽 입구에서 광장을 지나 맞은편에 매표소가 있다.
건청궁은 경복궁의 가장 안쪽에 있다 보니 입구부터 꽤 걸어야 한다. 근정전과 경회루를 지나 대략 15~20분 정도 걷다 보니 향원정(香遠亭)이 보이기 시작했다. 향원정은 넓은 연못 한가운데에 2층 누각이 있는 아름다운 호수 정원이다. 고즈넉한 정자 주위로 수면 위 일렁이는 수련이 가득 있어 여기저기 사진 찍는 관광객이 많다.
향원정은 향기가 널리 퍼져나간다는 뜻으로, 한자가 적힌 현판은 고종이 직접 썼다고 한다. 고종이 연못과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현재도 연못 주위 의자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쉬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처서가 지나고부터 더위가 조금 걷힌 덕에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향원정 뒤편에 바로 건청궁 입구가 있으니, 건청궁에 들어가기 전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연못을 바라보며 더위와 땀을 식히고 들어가 보자.
조선의 숨결이 그대로, 건청궁
경복궁 안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궁인 건청궁(乾淸宮). 고종이 개인 내탕금(임금의 판공비)을 들여 직접 건설을 명령해 조선 극 후기 경복궁 최북단에 지어졌다.
사실 건청궁은 고종과 황후의 생활관이 아니라 역대 임금의 초상화와 옥쇄, 글씨가 적힌 문서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경복궁 화재 이후 고종과 황후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885년 건청궁에 다시 머물며 경복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공간이 됐다.
건청궁은 크게 장안당(長安堂), 곤녕합(坤寧閤), 복수당(福綏堂)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청궁 입구를 통과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전각이 바로 장안당이다. 화려하게 금빛 수를 놓은 알록달록한 일월오봉도와 용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용상에는 직접 앉아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어 인증샷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용상의 오른편엔 과거 고종이 신하들과 집무를 보고 사신을 대접하던 공간이 있다. 건청궁은 최초로 전기를 들여온 곳인데, 그 고증을 그대로 재현한 전등도 함께 있다.
해가 진 후에도 국무에 열중한 고종의 방을 밝히던 것처럼 영롱하고 따뜻한 불빛까지 구현해 냈다. 전등과 용상, 병풍 등 모든 물건과 소품들은 무형 문화재 장인들이 하나하나 수공업으로 만든 작품이다.
장안당의 안쪽으로 더 들어오면 향원정이 내려다보이는 누마루에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다.
이번 건청궁 개방의 핵심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사진까지 찍을 수 있어 길게 줄이 늘어졌다. 누마루는 촘촘한 나무 장판과 창문에 달아놓은 전통 장식품, 전통 탁상으로 깔끔하게 꾸며놓은 곳이다.
맨발로 들어가 앉아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향원정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기 좋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녹음과 연못 덕에 대부분 창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누각으로 드는 바람으로 창문에 달아놓은 색색의 천이 휘날리는 것이 아름다우니, 바람이 부는 때에 맞춰 사진을 찍는 걸 추천한다.
장안당과 곤녕합은 작은 복도로 연결돼 있다. 곤녕합은 명성황후와 궁녀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장안당의 복도를 넘어가니, 창가를 바라보며 잠시 앉아 갈 수 있는 작은 방이 나온다. 궁녀들이 머물며 일하던 공간으로, 주방으로도 사용했던 공간이다.
복도각을 따라 조금 더 이동하면 비극적인 참변이 일어났던 왕비 생활실과 알현실이 등장한다. 여기서부터 서구적인 소품과 병풍과 창살 등 한국의 전통이 어우러져 오묘한 분위기로 가득 찬다.
실제 외국 사신이나 외교관들의 기록을 따라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흔히 실록에 기록되는 의례 공간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어 고증하기 좋지만, 생활공간은 그렇지 않아 사용하던 사람의 취향과 생활 습관, 몇몇 기록에 맞게 구현한 것이다.
서양식 소품들로 꾸민 방과 벨벳 의자에 앉아 알현했다는 기록이나, 커피와 케이크를 대접받았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공간의 성격까지 더불어 재현했다.
건청궁의 실내에서 조선의 숨결을 충분히 느꼈다면 외부로 이동해 보자. 안전을 위해 입장은 장안당, 퇴장은 곤녕합으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다. 곤녕합 전각 앞에는 궁녀들이 자고 생활하며 황제와 황후를 보필하던 거처로 추정되는 ‘복수당’이 있다.
사진 배경에 다른 사람이 나오는 게 싫다면 길게 이어진 복수당 전각에서 사진을 찍는 걸 추천한다. 북적이는 장안당과 곤녕합과는 달리 이곳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나치기 때문에 고즈넉한 분위기와 가득한 해당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다만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조도를 조절해야 한다.
건청궁의 왼쪽에는 고종의 개인 도서관이자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집옥재(集玉齋)’가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팔각형 모양의 2층 전각이다. 중국식 건축방식을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공간이다.
이곳은 현재 일반 시민들에게도 개방하는 궁궐 속 북카페다. 무더위가 지속되는 7·8월에는 개방하지 않지만, 지난 1일부터 다시 문을 열었다. 고종이 실제로 사용했던 도서관에서 마음대로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한 번에 50명씩만 입장하기 때문에 쾌적하게 내부를 관람하고 책을 읽을 수 있다. 집옥재의 내부 천장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화려한 쌍용과 다채로운 색을 사용한 그림들로 빼곡해 밖보다 안이 더 아름답다.
집옥재 한쪽에는 ‘가배(커피의 옛말)’를 판매하고 있어 고종이 커피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흥미로운 공간일 것이다. 건청궁 개방 일자와 18일 정도 겹치니, 건청궁에 방문할 때 함께 방문하는 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