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지도 않는데... ‘3억3000만원’ 와인까지 등장한 추석선물 초고가 경쟁
백화점과 대형마트, 편의점 같은 주요 유통채널이 올해 추석 선물로 수억원이 넘는 비싼 술을 앞세우고 있다. ‘명절 최고가(最高價) 선물’ 자리를 두고 경쟁하듯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모양새다.
매년 명절마다 엎치락뒤치락 순위 다툼을 벌이는 사이 최고가 선물 값은 10년새 30배가 넘게 치솟았다.
‘경기가 움츠러드는 시기에 위화감을 형성한다’는 비판에도 주요 유통채널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장 비싼 선물을 팔겠다’는 유통채널 욕심에 정(情)을 주고 받는 선물 본연의 가치는 옅어지고 있다.
주요 유통채널은 지난 4일부터 올 추석 선물 예약 판매를 마치고 본(本)판매에 돌입했다. 본 판매에 들어서면 이들은 서로 올해 최고가 선물이 무엇인지부터 내세운다.
올해는 롯데백화점이 내놓은 프랑스 최고급 와인 샤토 페트뤼스(Petrus) 18병 세트가 추석 최고가 선물 자리를 차지했다.
이 와인은 세계적인 와인 산지 프랑스 보르도를 대표하는 와인 가운데 하나다. 세계사 주요 장면에도 수차례 등장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페트뤼스를 결혼식과 대관식에서 마셨다.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재클린 여사도 이 와인 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승지원(承志園·삼성그룹 영빈관)에서 연 전경련 회장단 만찬에서 이 와인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백화점은 2001년부터 2018년까지 한 해마다 한 병씩 각기 다른 18병을 세트로 준비했다. 가격은 3억2900만원이다.
현대백화점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 와인 양조가’ 마담 르루아 그랑크뤼 컬렉션으로 맞불을 놨다. 르루아 여사는 ‘태어난 지 15분 만에 입술에 와인을 댔다’, ‘3살 때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천재적인 능력을 자랑한다.
1932년생 르루아 여사는 올해로 나이가 만 91세다. 은퇴가 멀지 않았다는 추측이 나오면서 그가 만든 와인 역시 매 분기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현대백화점이 준비한 이 와인 세트는 3병에 1억4900만원이다. 와인 1병당 가격으로 치면 롯데백화점 세트를 멀찌감치 앞장 선다.
신세계백화점은 와인 대신 위스키로 승부를 걸었다. 신세계백화점은 스코틀랜드 싱글몰트 위스키 보모어 50년 1969를 1억500만원에 단 1병만 판매한다.
올해는 편의점 프랜차이즈도 이 경쟁 대열에 합류했다. GS25는 1억원짜리 고든앤맥페일 1949를 추석 선물로 선보였다. CU는 3400만원짜리 글렌그란트 60년을 단독으로 준비했다.
고급 와인이나 고연산 위스키는 갈비·정육세트만큼 인기 있는 명절 선물이다. 특히 크고 무겁지 않은 데다, 브랜드까지 확실해 웃어른 선물로 선호하는 소비자층이 예전부터 두터웠다.
그러나 지금처럼 수억원에 달하는 초(超)고가 주류가 명절 선물 시장에 나타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2010년 이전에는 프랑스 코냑 루이 13세가 명절 최고가 선물 명단에 단골로 올랐다. 이 코냑은 전직 대통령 아들, 국회의원 뇌물 리스트에 등장해 ‘선물이냐 뇌물이냐’는 구설수에 오른 전력이 있다. 그만큼 상징적인 술임에도 2008년 기준 명절 선물로 300만원 대에 팔렸다. 통계청 기준 현재 화폐 가치로는 430만원 정도다.
10년 전에도 1000만원을 넘어가는 술은 명절 선물과 거리가 멀었다. 2013년 추석에는 현대백화점에서 선보인 560만원 상당 미국산 컬트 와인 스크리밍 이글과 할란이스테이트 세트가 1위를 차지했다.
컬트 와인이란 뛰어난 맛과 구하기 힘들 만큼 적은 생산량으로 열광적인 추종자를 거느린 와인을 뜻한다. 이듬해에는 990만원짜리 프랑스 샤토 무통 로칠드 와인 세트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가격만 놓고보면 지난 10년 사이 최고가 선물세트는 990만원에서 3억2900만원으로 33배나 뛴 셈이다.
김주한 미국 블루브릭 바텐더는 “우리나라 주류 시장이 커지기 전에는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1000만원 넘게 쓰긴 어렵다’는 심리적 한계치가 있었다”며 “이후 일부 소비자들이 술을 투자 수단으로 대하고, 주요 국가에만 배분하던 희귀 주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 금액 제한선이 올랐다”고 평가했다.
유통업체들은 구하기 어려운 초고가 주류를 먼저 확보하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하지만 어렵게 구했다고 해서 모두 팔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팔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GS25가 지난해 추석 대대적으로 내세웠던 7900만원 DRC 로마네꽁티(Romanée Conti)가 대표적이다.
2021년 롯데호텔 시그니엘 부산이 선보인 6리터짜리 루이 13세 마투살렘 세트도 마찬가지다. 이 코냑 세트는 장인이 만든 디캔터와 함께 2억4000만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었다. 그 값을 치르고 사가는 사람은 없었다.
편의점과 호텔 입장에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호가하는 이들 초고가 주류는 딱히 팔기 위해 내놓은 상품이 아니다. 백화점 못지 않게 그럴 듯한 명절 선물을 판다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한 미끼 상품에 가깝다. 초고가 주류를 직접 사들이지 않고, 수입판매업체와 소비자를 중개·유통하는 구조라 재고에 대한 부담도 없다.
백화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명절 최고가 선물 자리를 차지하면 ‘그 어떤 곳보다 비싼 상품을 판다’는 이미지를 쌓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신선한 아이디어는 사라진다. 올해 롯데백화점에서 파는 최고가 페트뤼스 세트는 지난 설 현대백화점이 팔던 상품 구성과 똑같다. 당시 현대백화점은 같은 페트뤼스 세트를 3억4000만원에 내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수입사 관계자는 “이전에 로마네꽁띠 자리를 페트뤼스가 물려 받고, 이제 르루아가 페트뤼스를 밀어내는 돌려막기식 구성”이라며 “누구나 알 법한 인지도, 인정할 만한 품질, 아무나 사기 어려운 가격을 모두 갖춘 술은 우리나라 시장에 몇 종류 되지 않다 보니 무난하게 유명한 와인을 고른 탓”이라고 꼬집었다.
백화점 같은 주요 유통채널이 초고가 주류로 벌이는 자존심 싸움 유탄(流彈)은 결국 소비자에게 튄다. 명절 선물은 비싼 가격표를 달수록 대접을 받는다. 세트로 구성했다고 가격을 깎아 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국제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값을 메기는 경우도 있다.
가령 2001년부터 2018년 사이 양조한 샤토 페트뤼스는 프랑스와 영국, 홍콩, 일본 같은 국제시장에서 거래 중인 물량이 적지 않다. 1병 당 가격 역시 품질이 뛰어났던 해를 기준으로 잡아도 전 세계 평균가 800만원 안쪽에서 거래된다. 평균가를 감안하면 와인에 붙는 관세를 포함해 2억원 안쪽에서 살 수 있다.
해외 주요 경매사와 주요 와인 판매상(merchant)들은 이 정도 규모 거래를 하는 개인 소비자에게 직접 사람을 보내 와인을 전달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백화점 못지 않은 서비스다.
일본 유통사 후지이트레이딩의 이케다 쇼고 주류 담당 마케팅 담당자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일본에서도 오봉(お盆·양력 8월 15일)이나 신정에 한국처럼 선물을 나누지만, 버블 경제가 무너진 이후 백화점에서 초고가 선물 경쟁은 하지 않는 추세”라며 “대신 같은 가격으로 얼마나 실속 있고, 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선물을 구성했느냐가 상품기획자(MD) 역량을 판단하는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사는 사람도 없고, 가격 경쟁력조차 없이 그저 고가 상품을 자랑하는 경쟁은 유통채널과 소비자 모두에게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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