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시련, 거울 삼아 살아가길” 6·25 참전용사였던 조부의 추억록
“조국의 영광과 민족의 번영을 천세 만세에 기리기리(길이길이) 누리기 위하여 나의 청춘기 한 토막을 깨끗이 바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사개년의 갖인(갖은) 시련을 거울 삼아 우리의 자손과 후배를 화원(花園)으로 선도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합시다.”
6·25 참전 용사 서만응(93)씨의 ‘추억록’에 나오는 문구다. 추억록은 1955년 제대 당시 동기생들의 글을 모아 엮은 문집. 서두에 동기생 55명의 명단과 “호국신(護國神)으로 산화하신 동기생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발간사가 실려 있다. 청춘이 묻어나는 글도 있다. “전우들의 앞날에 예뿐 색씨 많이 오기를 깊이 빌 뿐이오니!”
서만응씨는 1951년 스물한 살에 입대했다. 대한민국에서 체계적 징병을 시작한 첫해다. 1946년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1949년에는 병역법을 시행했지만 국군 규모를 10만명으로 제한한 미군정 조치에 따라 6·25 이전까지는 본격적 징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병무청에 따르면 1951년 봄 남한 일대를 수복하면서 비로소 정상적 병무 행정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씨는 훈련소를 거치지 않고 7사단 기관총 사수로 전선에 배치됐다. 전투가 벌어지면 총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도록 기관총을 쐈다. 핏물로 지은 밥에는 붉은 빛이 돌았다. 휴전협정일인 1953년 7월 27일엔 전장 곳곳에서 “한 시간만 버텨라!” “5분만 버텨라!”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협정 발효 시각인 그날 오후 10시엔 사방이 적막했다고 한다. 어떤 환호성도 없이 풀벌레 소리가 들려 올 뿐이었다.
추억록은 서만응씨 손자 서동영씨가 보냈다. “계급장, 훈장처럼 할아버지의 보물들은 모두 군 시절 것이거나 전공을 기리는 물건”이라면서 “그것이 할아버지께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신병교육대 조교 출신인 서동영씨는 추억록을 보며 훈련병들이 수료를 앞두고 쓰는 ‘롤링 페이퍼’를 떠올렸다. 참혹한 전쟁을 겪고 쓴 글에 ‘추억’이라는 제목은 어색한 것 같다고 얘기했을 때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 사는 일이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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