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아프리카 거쳐 중남미… 일대일로, 지구 한바퀴 돌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서유근 특파원 2023. 9. 5.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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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턱밑까지 진출한 중국
아르헨티나의 공자학원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경제학부 건물 2층에 있는 중국 정부 산하 교육기관 ‘공자학원’ 입구. /서유근 특파원

지난 1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 경제학부 건물 2층에 있는 ‘공자학원’. 내부에는 중국어와 스페인어로 된 중국 역사·철학·언어 등을 다룬 책 수백 권과 중국 유학 소개 책자들이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선 중국어와 중국문화 등 강좌에 대한 문의를 받았다. 공자학원 관계자는 “이 대학 학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강좌를 수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가 자국의 언어·문화 등 소프트파워를 알리겠다는 취지로 세계 각지에 세운 기관이다. 그러나 미국·캐나다·유럽 등 주요 서방 국가에서는 공자학원을 중국 공산당과 연계돼 자국 안보를 위협하는 선전·첩보 기관으로 보고 적극 퇴출에 나서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중남미의 상황은 다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자학원에서만 연간 2000~2500명이 중국 관련 강좌를 수강하고 있고, 코르도바대와 라플라타대 등 거점 국립대에도 공자학원이 설치돼 있다. 지역 경제 대국인 브라질(10곳)과 칠레(2곳)를 비롯해 중남미에서만 40여 곳이 운영되고 있다.

1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대 경제학부 건물 2층에 있는 중국 교육부 산하의 '공자학원' 내부. /서유근 특파원

유라시아와 두 대양(태평양·대서양)을 두고 떨어진 중남미도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영향권에 편입되고 있다. 특히 중국은 공자학원을 앞세워 우호적 여론을 현지에 조성하고,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미국이 자국의 뒷마당으로 여겼던 중남미에서 도로·항만·철도 등 대규모 기반시설 구축 사업을 잇따라 수주하며 경제적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중국이 특히 눈독을 들이는 것은 항만이다. 미국 싱크탱크 ‘안전한 자유사회를 위한 센터(SFS)’와 ‘라틴아메리카 경제관측소(OBELA)’ 등에 따르면, 중국이 국영 기업과 민간기업을 앞세워 운영권을 확보했거나 새로 짓기로 한 중남미 항구는 40여 곳에 달한다.

이 가운데 최근 주목받는 것은 페루에 건설 중인 찬카이 항구다. 페루 수도 리마에서 북쪽으로 60㎞ 떨어진 이곳을 중국 국영 코스코해운(COSCO)이 30억달러(3조9600억원) 이상을 투자, 지분 60%를 확보했다. 중국은 최대 수심이 16m에 달하는 이곳에 연간 500만개 이상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고, 파나맥스급 선박(파나마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크기로 길이 295m, 너비 32m)도 정박할 수 있는 남미 최대 규모의 무역항을 만들고 있다. 이 항구가 문을 열면, 중국과 남미 간 무역 항로 이동 시간을 현재 45일에서 35일로 줄일 수 있다.

지난달 22일(현지 시각) 중국 국영 코스코해운(COSCO)이 건설 중인 페루 찬카이 항구의 모습. /EPA 연합뉴스

중국은 국영기업 차이나머천트(초상국항만)를 통해 브라질 파라나구아 항구의 지분 67.5%도 확보했다. 이 항구는 브라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농산물 수출 항구로 대두 등 브라질 남부 곡창지대 농산물의 수출 통로다. 중국은 이 밖에 멕시코의 베라크루즈·엔세나다·만사니요·라사로 카르데나스와 자메이카 킹스턴, 바하마 프리포트, 파나마 발보아 등의 항구 지분도 확보했다.

중국은 육상 도로·철도망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국영기업 중국철도건설공사는 2021~2022년 총 14억5100만달러(약 1조9145억원)를 들여 칠레 탈카-코이푸이 고속도로(354㎞)의 32년 운영권을 확보했다. 중국 기업들은 칠레 수도 산티아고 지하철 7호선과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 지하철 1호선 수주에 잇따라 성공하며 철도 시설 구축에도 성과를 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곳곳에 항만·도로·철도 등 기간 시설을 구축하며 자국의 경제적 영향권으로 편입시켜온 일대일로 사업과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그래픽=양인성

중국이 중남미 일대일로를 통해서 군사적 영향력까지 키우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이 같은 우려를 자아내는 곳이 인민해방군 산하 위성발사추적총통제국이 관리하는 아르헨티나 중서부 네우켄 우주기지다. 아르헨티나는 1991년에 정부 기관 우주청을 설립할 정도로 우주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왔는데 최근 중국과의 협업이 두드러진다. 특히 네우켄 우주기지의 경우 ‘기지에서 수행되는 활동을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는 양국 정부의 계약에 따라 비밀리에 운영되면서 중국의 간첩 및 기타 군사 활동에 대한 소문이 증폭되고 있다.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등에도 인민해방군과 연계된 국영기업들이 운영하는 10여 곳의 위성기지가 있다.

이런 기지들이 사실상 중국의 첩보 시설일 수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중국 연구진은 2019년 스웨덴이 운영하는 칠레 산티아고 위성기지에서 군사 목적의 활동이 의심돼 퇴출된 전력이 있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남미에 있는 중국의 지상 우주기지들은 미국과 근접해 미국의 자산을 감시하고 민감한 정보를 가로채는 데 사용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런 사례들이 알려지면서 중남미 국가에서 일대일로에 대한 경계 목소리도 나오고, 진행 사업이 보류되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최근 아르헨티나에서는 산시화학공업그룹이 남미 최남단 티에라델푸에고에 12억5000만달러(약 1조6500억원)를 투자해 석유화학단지를 포함한 다목적 항구를 건설하는 프로젝트가 계약 성사 직전 보류됐다. 중국은 남극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눈독을 들여왔지만, 국가 안보에 중대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반대 여론이 분출했다.

☞일대일로(一帶一路)=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9월 7일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대학 강연에서 처음 제시한 중국의 대외 팽창 정책. 중국의 서쪽인 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잇는 21세기판 육·해상 신실크로드를 개척한다는 구상이다. ‘차이나 머니’를 앞세워 미국의 손이 닿지 않는 개발도상국에서 기반시설을 깔고 사실상의 군사기지·보급 거점을 확보하며 미국 중심 세계 질서에 대항하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강력한 경제·군사력으로 구축한 세계 질서. 로마제국이 패권을 잡아 유럽에 평화(Pax)가 왔듯이 미국에 의해 세계 평화가 유지된다는 의미다. 2차 대전 직후 132억달러를 들여 유럽을 재건하는 ‘마셜 플랜’을 집행하고, 미국 주도 국제·금융 질서를 구축하며 본격화됐다. 미군의 해외 주둔과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등 국제기구를 이용해 영향력을 주로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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