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우리 할머니, 홍순씨

이예하 ‘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저자 2023. 9. 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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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 씨~.” 우리 할머니를 나는 이름으로 부르고는 한다. 내가 살아온 세월보다도 오래된, 그 이름을 부르는 시간이 나는 좋다. 왜 좋냐고 묻는다면 이 이야기는 홍순 씨가 나보다 조그마했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어렸던 홍순은 동네에서 으뜸갈 정도로 똘똘한 아이였다. “홍순아~ 이것 좀 해줘”라며 본인을 찾는 사람들에게 멋지게 등장해서 히어로처럼 뭐든 해내곤 했더랬다. 그리고 성인이 된 홍순은 결혼을 하게 된다.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돈 한 푼 헛되이 쓰지 않는 할아버지가 홍순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홍순을 “아요~”라고 부르고는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하나 둘 태어나기 시작하며, 홍순은 자연스레 일을 시작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어서 발가락이 얼어붙는 줄도 모르고 일을 했단다. 그때의 홍순을 사람들은 “아줌마~”라고 불렀다. 아이들이 자라고, 자라나 엄마를 덜 찾게 되었을 무렵부터는 “ㅇㅇ엄마”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이름이 홍순은 나쁘지 않았다. 다 그렇게 사는 거니까. 내 이름이 까마득해져도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줄 수 있음에 행복했다. 문득 우리 엄마도 나와 같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일렁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어느 이른 봄, 홍순은 본인의 아이의 아이인 나를 만나게 된다. ‘내 아이보다 예쁜 아이가 세상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라는 문장이 그날을 설명해주고는 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홍순의 두 눈을 바라보며 “할머니”라고 불렀다.

홍순, 아요, 아줌마, ㅇㅇ엄마, 할머니. 여든 해에 가까운 시간 동안 홍순은 총 5개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세월의 훈장이 이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전부 그대로인 것 같다가도 이름을 들을 때면 세월을 실감하고는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손녀가 홍순을 “할머니”가 아닌 “홍순 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네의 야무지던 히어로를 부르던 그 이름으로 말이다.

나는 홍순이라는 사람을 바라보고 싶다. 다른 이름도 각자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이 행위에는 당신이 이름을 꽉 붙잡고, 세상 하나뿐인 존재로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나의 소망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어렸을 적 멋지게 등장하던 히어로 홍순을 보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당신의 이름을 좋아하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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