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종합 예술… 독립기념관 터 잡을 때 옛 풍수로 대통령 설득
1982년 11월 20일 오전 전두환 대통령이 독립기념관 건립 후보지였던 충남 천원군(현 천안시) 목천면을 방문했다. 국민 성금이 모여들고 여러 도(道)가 유치 경쟁에 뛰어든 가운데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찾은 이곳은 순식간에 유력 후보지로 떠올랐다.
당시 대통령에게 터에 대해 설명한 인물은 건립추진위 기획위원으로서 이 땅을 찾아낸 건축가 김원(80)이었다. 1일 서울 대학로 사무실에서 만난 김원은 “풍수로 보면 멀리 늘어선 산들이 아침마다 절하는 ‘안산조배’ 형국이라고 설명했다”며 “새파란 건축가가 나서는 게 못마땅한 기색이었던 대통령도 결국 넘어갔다”고 했다. 엿새 뒤 정부는 ‘지형이 좋고 교통이 편리한’ 이곳을 기념관 부지로 공식 발표했다.
그때 일을 이야기하며 김원은 풍수지리서에 나오는 목천 일대의 그림을 보여줬다. “산의 형국이 워낙 뚜렷해요.” 독립기념관을 비롯해 1980년대 국가적 문화시설 조성 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그의 활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김원은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증축 설계)과 통일연수원(신축 설계) 등 작품으로 유명한 건축가다. 일찍부터 풍수에도 밝았다. “풍수는 미신 취급도 받았지만 건축의 입지론(立地論)과 연계해서 바라볼 만하다는 생각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풍수를 연구하는 건축가로 출연했던 방송을 보고 추진위에서 독립기념관 부지 물색을 요청했다. 그는 “서울-대전 사이에서 100만평을 확보하라는 청와대 지시에 쩔쩔매던 추진위에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나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독립기념관 이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옛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 예술의전당, 국립국악당을 조성하는 사업에도 추진위원 등의 자격으로 참여했다. 김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 자산들”이라며 “이런 대규모 시설들을 약 3년 만에 조성한 것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독립기념관 터를 잡은 건축가
독립기념관은 김원이 부지를 찾고 마스터플랜을 마련했지만 ‘겨레의 집’ 설계는 공모에서 당선된 건축가 김기웅이 담당했다. 당시 사업을 주도한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은 김원에게 설계까지 맡기려 했으나 김원은 “국민 성금으로 짓는 기념관 설계를 누군가에게 그냥 주면 안 된다”며 공모를 제안했다. 젊은 건축가의 태도를 높이 산 이 장관은 이후 여러 차례 김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김원은 “설계보다는 공모 절차 마련이나 심사위원 선정 같은 일을 자청했다”면서 “건축가로서 욕심도 났지만 내가 설계까지 도맡아 하면 뒷말이 나오고 좋은 평가를 받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백남준과의 인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추진위원을 맡았을 때 이어진 것이다. 건축가 김태수가 설계한 미술관의 로톤다(원형 홀)에 작품을 설치하게 된 백남준이 건축가의 도움을 요청했다. 거대한 구조물을 공간에 맞게 디자인하고 하중 문제를 해결할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역할이 추진위원이자 건축가인 김원에게 돌아갔다. TV 수상기를 구해주면 작품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던 백남준을 위해 수상기를 마련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때까지 백 선생 작품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퐁피두 센터의 모니터 400대짜리 ‘삼색기’였어요. 그 정도면 될 줄 알았는데 설계를 해보니 1000대는 있어야겠더군요. 당시 TV는 상당히 고가여서 기업들이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남을 작품으로 광고하는 셈이라고 삼성을 설득해 겨우 지원받을 수 있었죠.” 국립현대미술관의 상징 중 하나인 ‘다다익선’(1988)은 이렇게 탄생했다. 김원이 대표를 맡은 도서출판 광장에서 2012년에 펴낸 자료집 ‘다다익선’에 김원을 작품의 디자이너로 명시한 백남준의 친필 메모와 작품 제작을 논의하는 백남준·김원의 사진이 실려 있다.
백남준에 대해 “첫인상은 늘어뜨린 멜빵처럼 헐렁해 보였다”면서도 “가식이 없고 솔직한 분”이라고 했다. “한번은 뉴욕에서 같이 아침을 먹는데 다 먹고 빵 두 쪽이 남았어요. 그걸 냅킨에 싸서 호주머니에 넣더군요. 얼마 전까지도 끼니를 걱정하느라 습관이 됐다면서 멋쩍게 웃었죠.”
김원은 “정부 사업에 관여하는 동안 후배들한테서 ‘5공 건축가’ 소리도 들었다”고 했다. 왜 정부에 협조하느냐며 직원들이 항의한 일도 있었다. 그는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할 텐데, 차라리 내가 냉정하게 평가할 것은 평가하며 제대로 하겠다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정권에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았던 사례로 김원은 독립기념관 전시 계획을 바꾼 일을 꼽았다. “독립기념관을 지을 때 ‘아부꾼’들이 내세운 논리가 1~5관에서 삼국시대부터 독립운동기에 이르는 역사를 보여주고 6관에 ‘제5공화국관’을 끼워넣어 정권의 정통성을 내세우자는 거였죠. 나는 이란의 호메이니가 혁명 이후에 팔라비 왕조 기념관을 파괴한 일을 얘기했어요. 정권 바뀐 뒤에 없어질 전시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설득했더니 내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김원은 에세이집 ‘꿈을 그리는 건축가’(2019)에 “나는 지금도 독립기념관 제6전시관의 ‘5공 전시’를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관철시킨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썼다.
굴업도를 나오시마 같은 예술섬으로 설득
김원은 환경 분야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영월 동강댐 민관 합동조사단에 참여했다. 댐 건설이 희귀 동식물의 서식지를 파괴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정부가 조사단을 구성하고 조사 결과에 따르겠다고 밝힌 상황이었다.
“미국의 후버 댐 같은 대형 프로젝트들이 자연환경을 얼마나 훼손했는지 조사했어요. 처음에는 물 공급이나 전기 생산 같은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수십 년 지난 지금은 미국도 그런 대형 댐은 만들지 않습니다.” 조사단의 결론에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6월 5일 환경의 날에 백지화를 선언하면서 논란은 마무리됐다.
굴업도와도 인연이 깊다. 서해의 굴업도는 한때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후보지였다가 활성 단층이 발견되면서 철회됐다. 이후 대기업에서 골프장으로 개발하겠다고 나섰을 때 김원은 섬 지키기에 나섰다. “아름다운 섬을 그대로 지키면서도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일본의 나오시마 같은 예술 섬을 만들자고 주민들을 설득했어요. 주민들에게 빚이 있는 거죠.”
김원은 “설치미술가 조숙진의 작품을 다음 달부터 굴업도에 설치하고, 오래 전에 내가 고쳤던 굴업도 공소(천주교 예배소)를 새단장 하는 작업도 맡기려고 한다”면서 “뒤늦게 주민들과 약속을 지키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굴업도 바닷가에서 가져온 소라 껍데기를 꺼내 보였다. ‘2010. 4. 굴업도’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내가 정말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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