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95] 피카소와 오펜하이머
여인의 초상화다. 민트색 얼굴에 높이가 다른 두 눈이 제각각 옆과 앞을 향해 있다. 얼굴을 지나가는 청록색 세로선은 뒷면의 벽 장식과 연결된다. 팔짱을 낀 것 같기는 한데 풍만한 가슴 아래 손가락이 양옆으로 나와 있으니 도대체 이 여인의 몸이 어떻게 뒤틀린 건지 알 수가 없다. 제멋대로 던져 둔 퍼즐 조각처럼 뒤죽박죽인 이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가 연인이던 마리 테레즈 월터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압도적 흥행 1위 영화 ‘오펜하이머’를 본 독자라면 이 그림이 눈에 익을 것이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도 영국 유학 시절에는 적성에 안 맞는 실험물리학 때문에 우울증과 향수병에 시달렸다. 마침내 원자 모델을 개발한 닐스 보어를 만나 양자역학 세계에 발을 내딛던 즈음 미술관을 찾은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게 바로 이 그림이다. 영화에서는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이 그림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피카소는 수세기 동안 서양 미술의 황금률처럼 지켜졌던 원근법을 산산이 깨뜨렸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나니 연인의 눈, 코, 입을 하나씩 떼어 앞, 뒤, 옆, 위 어디서도 볼 수 있다. 의자에 앉은 그녀를 멀리 두고 보다, 바짝 붙어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기를 반복했으니, 텅 빈 공간과 몸 사이의 구분조차 흐릿해졌다. 이처럼 종전 틀을 깨고, 세상의 이면을 보며, 시간과 공간 개념을 새롭게 세운 피카소의 작품 이후로 오펜하이머는 고전 물리학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미술관에만 간 건 아니다. 오펜하이머는 스트라빈스키를 들으며,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었다. 상식을 뛰어 넘는 상상은 예술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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