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겉모습’ 서울엔 없다, 허세 없이 TSMC·폭스콘 키운 대만 DNA
화려한 한국 겉모습에 비해
허세 없이 소박한 대만
세계 IT업계에선 승승장구
실용·효율 DNA 우리도 새겨야
서울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89년 1월이었다. 태어나자마자 가족과 함께 대만 타이베이로 옮겨갔다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 타이베이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눈이 내렸다. 10층 훨씬 넘는 건물로 이뤄진 대단지 아파트와 자동차가 빽빽하게 들어선 주차장이나 도로 역시 타이베이에선 볼 수 없던 것이었다. 내가 태어난 나라,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나라가 이렇게 예쁘고 반짝반짝한 곳이라니. 우중충한 외벽에 이끼까지 잔뜩 낀 타이베이 아파트나 자전거, 오토바이가 느릿느릿 다니던 그곳의 도로는 빨리 기억에서 지웠다.
1981년 한국을 떠난 아버지와 어머니가 느낀 충격과 감회는 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70년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풍요롭고 화려해진 서울을 보면서 어머니는 놀라움을 넘어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지금도 “백화점엔 대만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 해외 브랜드와 명품이 가득했고, 서울 여자들의 패션과 화장도 타이베이보다 어찌나 세련됐던지”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타이베이에서 자전거만 타고 다닌 아버지도 서울에 온 지 1년 만에 소형차 한 대를 장만했다.
그 후 대만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두 번 있었다. 첫째는 2002년 한국이 대만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을 앞질렀단 기사를 봤을 때였다. 서울에 온 이래 당연히 한국이 대만보다 훨씬 잘사는 줄 알았다. 당시 국민학교에선 이틀에 한 번씩은 ‘한강의 기적’을 가르치며 한국이 이룬 경제적 성장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줬고, 주변을 둘러봐도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를 가진 사람들이 타이베이보다 훨씬 많았다. 소박하다 못해 다소 촌스러운 타이베이보다 서울이 훨씬 멋지다고 생각했을 때, 사실 대만은 한국보다 잘살았던 것이다. 올 들어 대만 GNI는 다시 한국을 앞질렀다.
대만의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인 TSMC 기사를 쓰면서 대만을 또다시 떠올렸다. 창업자인 모리스 창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으로부터 “메모리 반도체는 엄청난 자본과 인재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위탁 생산으로 마음을 굳혔다. 반도체가 최근 국제 정세에서 핵심 무기로 떠오르기 전까지 TSMC라는 회사 이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처럼,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폰을 쓰는 많은 사람들은 ‘애플’이란 브랜드만 알지 아이폰을 폭스콘이 만든다는 것도, 폭스콘이 대만 회사라는 것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대만인들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경험한 소박하고 낙후한 대만의 실체는 허세를 부리지 않는 실용성이었다. 오래된 건물을 헐고 다시 짓지 않는 것은 비가 많이 오고 지진이 나는 대만의 자연환경에 최적화된 선택이었다. 명품이나 브랜드에 목매지 않은 것도 자원이 거의 전무한 작은 섬나라가 먹고살기 위해 검소와 효율을 중시했기 때문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이들이 대만의 주류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이들은 중국이 추구하는 화려함과 웅장함을 따라가길 일찌감치 포기했다.
실용과 소박은 대만인의 DNA에 새겨졌고, 대만이 반도체와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일조했다. 대만 회사는 아니지만 인공지능(AI) 학습용 반도체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한 엔비디아의 창업자 젠슨 황이나 엔비디아의 뒤를 바짝 뒤쫓는 AMD의 CEO 리사 수 모두 대만계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1989년에 처음 접한 서울은 샴페인 거품이나 솜사탕마냥 달콤하고 풍요로워서 금세 나를 매혹시켰다. 하지만 세계에서 승승장구하는 대만계 인물과 대만 기업을 볼 때면 종종 후회한다. 유년 시절 내 몸에 침투했을 대만의 DNA를 너무 빨리 포기해버린 건 아니었을까.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