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오펜하이머 모멘트와 첨단 과학기술의 불편한 진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가 화제다. 천재 과학자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라 지루할 법한데도 극적 전개와 함께 과학자의 인간적 고뇌를 잘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난 8월15일 개봉했는데 '만약'이란 가정을 해본다면 오펜하이머는 광복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펜하이머가 핵무기 개발에 실패했다면 일본에 원자탄이 투하되지 않았을 거고 그랬다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나 우리의 해방도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펜하이머가 한국의 해방을 가져다준 과학자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맨해튼 계획은 2차대전 중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 캐나다가 참여한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다. 미 육군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이 총책임자로 1942년부터 1946년까지 계속됐다. 1945년 한 해 동안 고용인원만 13만명, 예산은 20억달러였다. 현재 가치로 30조원 이상이다. 이 거대한 무기 연구·개발에는 수많은 과학자가 동원됐다.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요한 폰 노이만, 리처드 파인먼 등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 물리학자가 대거 참여했고 과학자의 수장은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였다.
1945년 7월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인류 최초 원폭실험인 '트리니티실험'이 성공함으로써 인류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살상무기를 갖게 된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국은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우라늄탄, 8월9일 나가사키에 플루토늄탄 등 2발의 핵폭탄을 투하했다. 두 도시는 잿더미가 됐고 당시 히로시마 인구 33만명 중 14만명, 나가사키 인구 27만명 중 7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겁한 일본은 백기를 들었고 이로써 2차대전이 종식된다. 원폭투하로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피폭도시에 살던 한인 중 원폭 사망자는 5만명이 넘는다.
핵무기 개발 성공에 환호한 오펜하이머는 막상 원자탄이 실전에 투입되자 자책하며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고 말했다. 과학연구가 엄청난 살상으로 이어지자 그는 핵무기 회의론자가 됐다. 그 깨달음을 '오펜하이머 모멘트'(Oppenheimer Moment)라고 부른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더 강력한 살상무기인 수소폭탄 개발에 극렬히 반대했고 이로 인해 모든 공직에서 쫓겨났다. 과학자들이 개발한 핵폭탄은 2차대전을 끝내고 수십만 명의 미군을 살렸지만 동시에 수십만 명의 일본인과 한국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펜하이머는 고뇌하며 후회했지만 핵폭탄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핵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순 없다. 맨해튼 계획이 촉발한 핵무기 개발경쟁으로 오늘날 지구상에는 2020년 현재 1만3000개 넘는 핵무기가 배치돼 우주에서 가장 위험한 행성이 됐다.
놀런 감독은 영화가 개봉한 후 언론 인터뷰에서 과학기술은 혁신과 편리함을 주지만 예기치 않은 극단적 위험도 가져올 수 있다며 '오펜하이머 모멘트'를 언급했다. 아울러 그는 AI(인공지능) 이슈를 소환했다. 핵폭탄 개발로 불확실성과 위험이 커졌듯이 작금의 강력한 AI 개발도 언젠가 유사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핵폭탄이 극단적으로 위험한 물리적 살상무기라면 인공지능 오남용은 핵폭탄급 디지털 위험이 될 수도 있다. 과학자의 첨단연구로 핵은 친환경 원자력 에너지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핵무기의 공포도 함께 안겨줬다. 과학자는 첨단 기술문명의 건설자면서 동시에 파괴와 살상의 연금술사다.
지고지선의 과학기술은 없다. 과학기술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과학기술은 불온한 정치와 결탁하기도 하고 비윤리적 전쟁에 이용되기도 한다. 첨단기술일수록 더 큰 편익과 더 극단적 위험이 수반된다. 극단의 위험에 고뇌하지 않는 과학은 위선이다. 과학자는 언제든 '오펜하이머 모멘트'를 맞을 수 있다. 과학기술 편익과 과학기술 위험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이 첨단 과학기술의 불편한 진실이다.
최연구 (과학문화칼럼니스트·필로 스페이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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