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오 사설] 윤석열 대통령 전략적 모호성 발언, 매카시즘과 닮았다
미디어오늘 1417호 사설
[미디어오늘 미디어오늘]
2015년 연말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라는 시가 대학가에 연달아 게시됐다. “'김일성 만세' /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 인정하는 데 있는데 /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이라는 내용의 시를 최초 대학가 대자보에 게시한 것은 경희대학교 한 학생이었다.
그는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표현의자유라는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그런데 학교 당국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대자보를 수거했다. 1960년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문제를 풍자했던 시의 내용이 2015년 현실로 재현된 셈이다. 김일성 만세 대자보는 오히려 확산됐다. 경희대의 다른 캠퍼스 게시판에 대자보가 붙었고, 고려대와 서울대에도 대자보가 등장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 얼굴에 '독재자의 딸'이라는 문구가 쓰인 포스터를 공방에 붙였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근거를 대라고 얘기를 들었던 사건이 회자되면서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 한국 표현의 자유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경찰과 검찰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라고 패러디한 대자보까지 등장했다. 한 편의 시조차도, 그것도 표현의자유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시를 허용하지 않은 한국 사회를 고발하려는 듯 대학가에서 '김일성 만세' 열풍이 벌어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일 무시무시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립외교원 설립 6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지금 우리의 자유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아직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그리고 반국가 세력은 반일 감정을 선동한다”고 했다.
'공산전체주의' '반국가 세력'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대통령 발언은 전략적 모호성을 띠고 있다. 공산전체주의라는 개념도 생소할 뿐아니라 그 세력의 실체를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오로지 대통령만 알 뿐이다. 위정자의 말이 모호하면 그 위력도 배가 된다. 행여 대통령이 말한 세력으로 찍힐까 두려워한다. 대통령이 말이 유령처럼 떠돌면서 공공의적 찾기가 횡행한다.
윤 대통령은 앞서 지난달 28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국회에서 여소야대에다가 언론도 전부 야당 지지 세력들이 잡고 있어서, 그래서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했다. 국정운영에 혼란을 빠뜨리기 위해 언론과 야당을 협잡하는 세력으로 규정한 것이다. 앞으로 일부 언론을 향해 편향성 지적을 넘어 반국가 딱지를 붙이고 야당 정치인 중 반국가 체제 인사로 솎아내는 작업에 나설 수 있다. 대통령 발언의 전략적 모호성은 이런 위험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입시키는게 목적이다.
결국 윤 대통령 발언은 표현의자유를 폭넓게 침해하는 것이며 매카시즘과 매우 닮아있다. 최연소 상원의원에 올랐던 조셉 R. 매카시가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라고 발언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사회를 광기로 몰아넣은 것처럼 '실체가 없었던 공산주의자 명단'을 현재 윤 대통령이 흔들고 있다.
하지만 매카시즘의 종말을 알린 건 언론의 사실보도였음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미 CBS는 한 공군장교가 공산주의자로 몰린 사건을 취재해 매카시즘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CBS 간판 앵커 에드워드 머로는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사실에 기반한 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 팩트가 모이자 매카시즘은 실체 없는 공포몰이 광기라는 것이 입증됐다.
지난달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을 놓고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근거에 대한 허점을 캐물은 모습은 사실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선동은 사실을 넘어설 수 없다. 이념 전쟁을 불사한 듯 험악한 말이 오고가고, 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를 <홍범도 장군 만세>로 바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역사 논쟁에 끼어드는 건 좋은데 치열하고, 정확하게 해야한다”는 기자의 말한디가 유독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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