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이길여 총장의 단 한번의 ‘플라타너스 로맨스’

김민철 논설위원 2023. 9. 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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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회>

가천대 이길여 총장이 대담 형식으로 삶을 회고한 책, ‘길을 묻다’를 읽다보니 본인의 로맨스를 다룬 챕터도 있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사는 이 총장이 겪은 ‘단 한번의 로맨스’라고 해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1960년대 미국 유학 시절 청혼을 받고 고민한 이야기였습니다.

◇'플라타너스 잎 사이로 비친 달빛’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이 총장은 1958년 인천에 산부인과를 개업해 당시 베이비붐을 타고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어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밟기위해 1964년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1968년 봄 뉴욕 퀸스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훤칠하고 잘생긴 교포 남자가 병원 앞으로 꽃을 들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 총장보다 두 살 많은, 서울에서 중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온 교포였는데, 검정색 링컨 콘티넬탈 세단을 몰 정도로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고 합니다.

이 총장은 ‘기다림과 설렘’ 속에서 화사한 원피스에 브로치를 달고 자주 그와 데이트를 즐겼다고 했습니다. 애틋한 로맨스가 이어지다 어느날 새벽 2시쯤 드디어 이 남자가 차 안에서 청혼을 합니다. 그리고 이 남자가 이 총장 무릎을 베고 누웠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렇게 좋아했던 남자 얼굴이 ‘플라타너스 잎 사이로 비친 달빛 때문인지’ 갑자기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22일 서울 중랑구 중랑천을 찾은 시민들이 나무 그늘 아래서 이른 더위를 피해 쉬고 있다. /뉴스1

그래서 ‘결혼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해버리고 기숙사로 돌아와 밤새도록 울었다고 합니다. 레지던트 기간이 끝나갈 즈음이었는데, 이 총장은 당시 귀국해서 적어도 2년 정도는 더 환자를 보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미국 영구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하필 ‘플라타너스 잎 사이로 비친 달빛 때문인지’ 청혼을 거절한 것입니다. 본인도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느낌이 들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며 “그게 제 운명이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

1932년생인 이 총장은 91세인 지금까지 독신입니다. 이 총장은 1968년 귀국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길여 산부인과’를 길병원으로 키웠고, 설립한 가천의대와 인수한 경원대를 통합해 가천대를 출범시켰습니다. 청혼을 받던 날 ‘플라타너스 잎 사이로 비친 달빛’이 다른 빛깔이었다면, 그래서 그 남자 얼굴이 매력적으로 보였다면 이 총장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이 총장은 이 책에서 결혼을 안한(또는 못한) 이유에 대해 “워낙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젊었을 때는 공부와 일에 빠져 있었고, 개업의가 돼서는 환자에 빠져 살았다”고 했습니다.

◇버즘나무와 양버즘나무

플라타너스는 은행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특히 서울의 대표적인 가로수 중 하나입니다. 매연 등에 관계없이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는데다 넓적한 잎은 한여름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고 소음까지 줄여주니 가로수로 제격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타너스는 가장 오래 전에 우리나라 가로수로 채택된 나무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좀 오래된 동네 가로수는 플라타너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0년대 초엔 버즘나무가 서울 가로수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88올림픽을 앞두고 은행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으면서 단숨에 은행나무에 1위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서울시 가로수 다섯 중 하나 정도(18.3%)는 플라타너스입니다.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 가로수.

플라타너스(Platanus)는 나무의 속명(屬名)이자 영어 이름입니다. 흔히 플라타너스라고 부르는 나무에는 버즘나무와 양버즘나무가 있습니다. 가로수로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은 거의 다 양버즘나무입니다. 양버즘나무는 공 모양의 열매가 가지 끝에 한 개 달리고 잎이 얕게 갈라지는 반면, 버즘나무는 열매가 2~6개 달리고 잎이 깊게 갈라지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답니다(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국내에는 버즘나무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 얘기입니다. 길거리에서 보면 플라타너스 열매가 하나씩 달려 있고 어쩌다 두 개짜리를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어렸을 때 이 나무 열매로 서로 꿀밤을 때리며 장난을 친 기억이 납니다. 아래 사진은 몇 년 전 미국 출장을 갔을 때 만난 나무입니다. 한 열매자루에 열매가 3개 달려 있고, 잎도 깊이 갈라져 버즘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버즘나무. 열매가 2~6개 달리고 잎이 깊게 갈라진다.

버즘나무라는 이름은 나무껍질에 생기는 얼룩무늬를 버짐에 이유해 붙인 이름입니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이름 유래죠? 북한 이름은 방울나무입니다. 통일이 되어 식물 이름을 정리할 때 참고할만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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