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도 부패는 용서 못한다”... 젤렌스키, 국방장관 전격 교체
러시아의 침공 1년 8개월째를 맞은 우크라이나가 그동안 전쟁 지도부의 역할을 충실히 해 온 국방 장관을 전격 교체했다. 이번 인사는 올해 초부터 꾸준하게 이어온 ‘부패와의 전쟁’에 연관되어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전쟁 중에도 근절되지 않은 우크라이나의 심각한 부패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해 기준 국제투명성기구(TI)의 부패인식지수(CPI)에서 우크라이나는 세계 180국 중 116위로 유럽 대륙에서 러시아(137위) 다음으로 가장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우크라이나에 가입 후보국 지위를 부여하면서 “부정부패 척결”을 최우선으로 강조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3일(현지 시각) “지난 550여 일간 러시아의 전면 침공에 대응해 온 올렉시 레즈니코우(57) 국방 장관을 교체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교체 배경에 대해 “우리 국방부엔 (전쟁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 군대·사회 전체와 기존과 다른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후임으로는 루스템 우메로우(41) 우크라이나 국유재산기금 대표를 지명했다. 그는 야당인 홀로스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흑해 곡물 협정 및 러시아와 고위급 포로 맞교환 등 굵직한 대외 협상 업무를 맡아왔다. 러시아가 강제 점령 중인 크림반도 원주민(크림 타타르인) 출신으로,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회복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성도 있다.
앞서 부총리로 재직하던 레즈니코우 장관은 전쟁 발발 약 3개월 전인 2021년 11월부터 국방 장관을 맡아 나름 혁혁한 공을 세웠다. 러시아의 침공 직후 젤렌스키 대통령과 수도 키이우에 남았고, 이후 영국과 미국, 독일, 프랑스, 폴란드 등 서방 주요국을 빠짐없이 찾아 지금까지 총 1000억달러(약 132조원)에 달하는 군사 지원을 받아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변호사 출신으로 국제 상업 거래와 분쟁을 다룬 경험이 있고, 영어와 폴란드어에도 능통했던 것이 빛을 발했다. BBC는 “레즈니코우는 성공적인 무기 로비 활동을 통해 전 세계 국방부 장관들의 새로운 롤모델이 됐다”고 평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고위층에 전방위적으로 불어닥친 부정부패 사정 바람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올해 초 터진 군납 비리 의혹이 결정적이었다. 국방부 내에서 군수품 조달을 담당한 뱌체슬라우 샤포발로우 차관이 콩 통조림와 우유 등 일부 군납 식품의 가격을 최대 10배까지 부풀려 지급했다는 폭로가 나왔고, 이를 계기로 조달 비리 수사가 벌어져 샤포발로우 차관과 키릴로 티모셴코 대통령실 차장이 사임했다. 당시 레즈니코우 장관은 연루 증거가 나오지 않았지만 관리 부실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군납 비리에 이어 병역 비리도 터져 나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11일 “징병 대상자의 국외 도피 알선 등 권한 남용과 부정 축재 사례들이 드러났다”며 전국 병무청장을 전원 경질했다. 그는 지난 6월 한 병무청장 가족이 스페인에 수백만 달러 상당의 차명 재산을 보유했다는 의혹이 나오자, 국가반부패국(NABU)에 전국 병무청을 전수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1인당 1만달러를 받고 징집 대상자를 면제 처리하는 등 총 33명에게서 112건의 혐의를 밝혀냈고 현재도 200건 이상을 조사 중이다.
가장 공정해야 할 법관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5월 반부패특검(SAPO)은 브세볼로드 크냐제우 대법원장의 자택을 압수 수색, 270만달러(약 36억원)를 찾아냈다. SAPO는 “대법원장이 지난해 4월 우크라이나의 한 광산 기업에 대한 지분 소송에서 올리가르히(재벌) 정치인 콘스탄틴 제바고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고 거액을 수뢰했다”고 밝혔다. 이 밖에 지난 1월엔 발전기 수입 편의를 봐준 대가로 40만달러를 받은 지역사회인프라정책부 차관이 체포됐고, 2월엔 헬리콥터 추락으로 현직 내무부 장차관 등 고위 인사 14명이 사망하자 아르센 아바코우 전 내무장관이 헬리콥터 부실 구매 혐의로 지목됐다.
올해 들어 지금까지 부정부패 혐의로 옷을 벗거나 체포된 우크라이나 고위 공직자는 알려진 것만 50명이 넘는다. “부패가 일상화된 사회에 막대한 전쟁 지원금이 쏟아 들어오자 그 용처를 놓고 더 큰 부정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의혹도 커지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시에 뇌물을 주고받는 것은 대역죄”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은 지난 2일 사기와 돈세탁 혐의로 올리가르히인 이호르 콜로모이스키(60)를 체포해 구금했다. 콜로모이스키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 준 드라마 ‘국민의 일꾼’을 제작·방영한 최대 민영 방송 ‘1+1′의 소유주로 젤렌스키와 유착 관계란 의심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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