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사는 고의나 중대 과실만 책임”?…‘민법 750조 위배’ 약관 인정한 국가
금융위, ‘중대한 과실’ 삽입 등 신탁사 유리하게 개정해 뒤늦게 논란
부동산 신탁사의 불공정 거래를 규제하고 투자자 권익 보호를 위해 국가기관이 인가해 사용하는 특정 금융투자약관이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의 ‘불공정 약관’ 판단에도 ‘과실 책임’을 묻는 민법과 배치되는 ‘중대한 과실’ 단서가 삽입되는 등 사실상 개악(改惡)됐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금융투자약관 인가기관인 금융위원회(금융위)는 법원의 ‘판결’과 동일한 공정위의 ‘무효심결’인 ‘시정권고’ 후에도 불공정성 논란이 빚어지면서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이다. 또 공정위는 불공정 약관 세부 사항 등을 4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대외적으로 공표하지 않아 동일 약관으로 계약한 추가 투자자들의 피해가 우려된다.
■ ‘신탁사 배상 책임 축소’한 약관 개정 파장…민원인들 “더 불공정 약관 돼버려”
4일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2019년 5월 공정위는 한국자산신탁(한자신)이 투자자와의 신탁계약에 사용하던 ‘분양형 토지신탁계약서’(차입형 토지신탁계약서)에 명시된 ‘특약사항’은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이하 약관법) 적용을 받는 ‘약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시정권고했다.
또 약관이 아닌 ‘특약사항’에 삽입한 9개 조항 등 불공정 약관 13개 조항은 불공정 약관에 해당됨에 따라 ‘무효’로 보고, 사업자로 하여금 시정권고서를 받은 날로부터 60일 이내 수정 및 삭제하도록 했다.
하지만 공정위 시정권고에 따라 2019년 8월 약관을 개정한 금융위가 불공정 약관을 시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신탁사 책임을 면책해주는 등 특혜성 약관 개정을 해줬다는 의혹이 뒤늦게 드러났다.
기자가 입수한 2019년 8월 당시 금융위가 개정 인가 후 공정위에 보낸 ‘금융투자업자약관’ 자료 등에 따르면, 금융위는 공정위가 시정권고한 ‘약관’ 4개 조항 중 단 2개만 수정·삭제했다.
우선 문제는 수정된 나머지 약관 2개 조항이 투자자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개정됐다는 점이다. 시정권고 당시 공정위가 문제삼은 대표적인 불공정 약관 조항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하자담보 책임’이다.
그런데 금융위는 해당 약관 조항들을 수정하면서 신탁사의 ‘과실’은 손해배상 책임에서 면제하고 ‘고의나 중대한 과실’로 한 한정해 개정했다.
이는 민법 750조가 ‘고의나 과실’로 인한 행위로 인해 위탁자, 수익자 등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수탁자는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규정한 것과 비교해 배상 범위가 크게 축소한 것이다.
공정위도 앞서 다수의 금융투자약관 불공정성을 판단하며, 사업자(신탁사)에게 ‘고의 또는 중과실’이 있는 경우 한정해 책임을 지도록 한 조항은 사업자의 손해배상 범위를 제한하거나 사업자가 부담하여야 할 위험을 고객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약관법(7조 2호) 위반에 해당해 ‘무효’라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신탁사와 분쟁을 빚고 있거나 잠재적 분쟁이 예상되는 일부 투자자들은 약관 개정이 당시 공정위 불공정 판단과 달리 투자자들에게 더욱 불리한 방향으로 개정·인가됐다고 지적했다.
더욱이 공정위가 ‘약관’으로 규정한 ‘특약사항’ 9개 조항은 아예 개정 약관에서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특약사항 9개는 약관임으로 수정, 삭제하라는 공정위 판단을 뒤집어 버린 셈이다.
공정위에 불공정 약관 심사를 청구한 피해자 측은 “금융투자약관의 인허가권을 가진 국가기관인 금융위가 합의제 준사법기관인 공정위 시정권고 후에도 오히려 신탁사의 ‘과실’을 법적 책임에서 면제해주는 불공정 약관을 개정·인가해줬다”며 “민법 750조에도 배치되는 위법한 약관 개정·인가로 신탁사 과실에 대한 피해까지 금융약자인 고객들이 떠안게 돼 버리도록 개악돼 버렸다”고 주장했다.
■ “신탁사가 시정권고 일부만 수용”?…시정명령 기회도 놓쳐
부동산 신탁업 약관 논란은 공정위의 시정권고 당시부터 불거졌다.
공정위가 약관으로 보고 불공정 약관으로 시정권고한 특약사항 9개에 대해 공정위와 금융위 등은 “신탁사가 시정권고를 모두 수용한 것이 아니다. 특약사항의 약관성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공정위와 금융위 입장을 종합하면, 시정권고를 신탁사가 받아들이지 않아 약관 개정에 반영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약관법 17조 2항 6호에 따르면 공정위의 시정권고를 받은 뒤, 사업자(신탁사)가 60일 이내 시정권고를 따르지 않으면 공정위는 시정명령을 할 수 있다. 이어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약관법 32조에 따라 2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 벌금형을 내릴 수 있다. 만약 사업자가 시정명령을 불이행하면 공표 후 검찰 고발까지 가능하다.
만약 신탁사 측이 공정위 등의 설명처럼 시정권고의 ‘일부분만 수용했다’면 사실상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공정위가 시정명령에 이르지 않도록 시정권고하는 등 신탁사 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대응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또한 금융위의 약관 개정 이후 4년이 흘렀지만, 한자신이 당시 시정권고를 받은 불공정 약관 13개 조항 중 ‘약관에 포함하거나 삭제해야 한다’는 특약사항 상당수를 계속 특약에 포함해 사용하고 점은 불공정한 약관으로 인한 투자자들의 피해 확산 우려를 키운다.
취재 결과, 2019년 8월 금융위 약관 개정 이후에도 광주광역시 쌍촌동(2019년 8월 26일 계약 체결), 충남 아산시(2022년 6월 28일) 신탁사업 현장에서도 ‘약관’에 포함돼야 할 조항을 ‘특약사항’에 포함한 계약서가 사용됐다.
기자는 금융위와 공정위 약관 관련 부서로 수차례 접촉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수년째 한자신과 당국을 상대로 불공정 약관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는 정유경씨는 “약관법 3조 설명의 의무에 따라 금융위와 공정위, 금감원은 시정권고 받은 약관을 개정한 사실과 적용 법 조항, 시정권고이유 상세 내용 등을 약관사용 계약자들에게 개별 통보해야 하고 한자신의 사실상 시정명령불이행에 대해서도 외부에 공표해야 하지만 덮고 있다”며 “앞으로 불공정 약관으로 인한 피해자들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고 피해자들의 국가를 상대로 한 징벌적 손해배상 등 집단소송 사태로 확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욱 기자 gun2023@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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