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

기자 2023. 9. 4.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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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새만금 세계잼버리에 참여한 수만명의 청소년들에게 하루 세끼 밥을 먹이고 마음 편히 화장실을 사용하고 깨끗하게 씻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일이 생기고 나서야 절감했다.

유정훈 변호사

태풍이 와서 폭우가 쏟아지는데, 도로가 잠기지 않도록 하고 위험 지역에서 사람을 대피시키려면 누군가 끊임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전국에 있는 수십만명의 학생이 매일 등교해서 수업을 하고 급식을 먹고 친구들과 지지고 볶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일상을 유지하는 이유는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한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은 사실 빛이 나지 않는다. 그 일을 제대로 했다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나 특별한 보상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무 일’이 ‘무슨 일’이 돼 사고가 터져야 비로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걸 수습하는 과정이 뉴스가 될 뿐이다. 게다가 평소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가도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을 한 번 잘못할 때 쏟아지는 비난은 한계를 모를 때도 있다.

정부나 기업에서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은 대체로 직접적인 매출이나 성과와는 무관한 조직, 전면에 나서 주목받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 담당한다. 보통 ‘스태프(staff)’ 또는 ‘백 오피스(back office)’라 부르는 조직이나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이들은 온갖 잡무를 처리하는 부서, 성과를 내는 일에 관료적 잣대를 들이대며 발목을 잡는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인력 감축이나 비용 절감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조직이 무리 없이 굴러가도록 관리하고 혹시 모를 리스크에 대비하는 일이다. 여기 생기는 빈틈은 일상의 중단이나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일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조직 차원에서 인력과 예산을 배정하고 지원해야 하며, 무엇보다 의사결정권자가 관심을 가지고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최종 결정은 내가 한다” 혹은 “최종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말은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집무실 책상에 이를 새긴 명패를 놓아두어 유명해졌다. 최고 책임자들이 굳은 결의를 밝히기 위해 즐겨 쓰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무한책임이다.

2009년 4월 미국에서 변종 H1N1 바이러스가 확인됐다. 당시 출범 직후였던 오바마 정부는 보건부 장관 후보자가 인준되자마자 전용기로 캔자스에서 싣고 와서 바로 세계보건기구(WHO)와의 회의에 집어넣을 정도로 급박하게 대응했다. 제약회사와의 공조로 백신을 개발하고, 주정부 및 기업들과 협력해 대응 방안을 준비했다. WHO가 40년 만에 처음으로 팬데믹을 선언하고 미국에서 1만2000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전문가들의 예상보다는 덜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을 통해 2010년 중반 팬데믹이 종식됐다는 뉴스는 헤드라인을 장식하지 못했다. 이때의 대비 태세가 효과를 발휘한 것은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가 닥쳤을 때였다.

오바마는 최고위직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자 본질은 때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회고한다. 미국 대통령의 결정과 책임에는 핵무기 발사 버튼처럼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만한 사건도 있지만, 주목받지 않는 가운데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대응하는 일도 포함되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 역시 그 최종 책임에 들어간다. 이를 위해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을 하는 조직과 인력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미리 챙겨야 한다. 최종 책임자의 책상에 늘 거시적 문제, 후대의 업적으로 남길 사건만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아무 일’이 ‘무슨 일’이 돼 최종 책임자에게까지 올라가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국민이 정치 지도자를 불신하고 직무 수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원대한 비전이나 올바른 이념을 제시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을 하지 못해 평범한 삶이 방해받으면 국민은 정부를 믿지 못하게 된다.

아무 일도 아닐 일이 돌연 무슨 일이 돼 뉴스가 되고 일상을 불안하게 만드는 시간이 꽤 지속되는 것 같다. 국민이 저마다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정부는 ‘아무 일도 없게 하는 일’에 좀 더 신경 쓰고 많이 유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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