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책 3권 값 1억6500만원
15세기 프랑스 땅 3분의 1을 소유했던 베리 공작은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그의 애장품인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는 양 200마리 가죽으로 만들었다. 책에 실린 세밀화 130여 장도 값비싼 청금석 안료로 그렸다. 삽화라기보다 작품이다. 9세기 아일랜드 켈스 수도원이 만든 ‘켈스의 서’도 아름다운 예술품이다. 하얀 양피지에 수놓은 정교한 문양과 화려한 채색을 보려고 연간 50만명이 이 나라를 찾는다.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으로 값싼 책이 나오기 전까지 책은 웬만한 부자 아니면 만들 수도 가질 수도 없었다. 고급 양피지로 2000쪽짜리 성경 한 권 만들려면 오늘날 가치로 2억원쯤 들었다. 포도밭을 팔아서 책 한 권 샀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 희귀서를 찾아내 필사해서 파는 ‘책 사냥꾼’은 중세 지식인 사이에 인기 직업이었다.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연 인문학자 페트라르카도 당대 유명한 책 사냥꾼이었다.
▶우리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편에 ‘대학과 중용은 면포 3~4필을 줘야 살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쌀 30말 가격인데 논 2~3마지기의 1년 생산량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책 한 권에 500만원으로, 1만원 조금 넘는 요즘 책값보다 400배 넘게 비쌌던 셈이다.
▶더 비싼 책도 얼마든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경제적 가치는 8000억원을 넘는다고 한다. 사실상 값을 따질 수 없다는 의미다. 절판된 책 중에 뒤늦게 몸값이 귀해지는 사례도 있다. 2001년 발간된 인기 소설가 이영도의 장편 판타지 ‘폴라리스랩소디’의 저자 사인이 들어간 한정판 정가는 7만원이었다. 지금은 중고 서점에서 50만~100만원에 거래된다.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이 대장동 업자 김만배씨와 허위 인터뷰를 한 뒤 1억65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신씨는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혼맥지도’라는 자신의 3권짜리 저서를 김씨에게 팔고 받은 책값이라고 했다. 국내 현대문학 서적 중 경매로 가장 비싸게 팔린 책은 1926년 출간된 한용운의 ‘님의 침묵’ 초판본으로, 지난 2월 1억5100만원에 팔렸다. 신씨의 책이 이 책보다 가치 있다고 믿을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인터넷 서점에서 ‘혼맥’이라고 쳐보니 ‘한국 최고 부자들의 금맥과 혼맥’이란 책이 1만7820원에 팔리고 있다. 신씨의 책은 이보다 1만배쯤 비싼데 정작 서점 검색에선 나오지도 않았다. ‘김만배’라서 책값도 만 배로 쳐줬느냐는 우스개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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