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이념의 무서움을 목도할 순간이 도래하는가

기자 2023. 9. 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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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이념은
한번 만들어지면
사라지지 않는다
반공주의도 마찬가지다
이념의 진짜 무서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반공주의는 특별하다
이것이 한국 반공주의의
색다른 무서움 낳는 모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정권의
반공주의를 기치로 한
이념정치의 구사는
체제 차원의 문제지만
요체는 이것이 나라 안팎에
이념적 적대감·대결 위기
동시에 키울 우려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이념은 무섭다. 이는 그저 좋은 것으로만, 그래서 지켜야만 하는 이념으로 여겨지는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폭력을 동반한 혁명과 전쟁을 통해 만들어져왔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민주주의 이념 자체가 엄청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가질 자격도 없는 피지배층으로서 온갖 고된 노동을 담당하는 하찮은 ‘민(民)’이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과 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민주정)가 뜻하는 바이기에 무섭지 않을 수가 없다. 즉 민주주의는 ‘전복’의 이념이다. 특히 기존의 지배층이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부의 독점적 소유권과 행사권을 부정당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대해 거세게 저항한다. 혁명과 전쟁은 그런 지배층의 반동적 저항에 맞서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좋은 이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이념과 역사 과정의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낳은 결과가 민의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라는 가치를 함양하고 구현해낸 덕분이다.

한국만 봐도 이념의 무서움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좌우 갈등을 통해 이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생하게’ 겪어봤다. 동포라는 추상적 관계 이전에 이미 형제와 벗들과 이웃들 간에 골육상쟁을 치러야 했다. 그 와중에 겪은 대표적 비극이 바로 섬 인구 10% 이상(2만5000~3만명)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4·3’이다. 75년이 지났다지만, (특히 우파 반공주의 세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규모와 방식을 담은 사건 기록만 봐도 여전히 충격적이다.

생명의 존엄성마저 묵살한 이념의 무서움을 느끼는 데 있어 75년은 결코 오랜 시간이 아니다.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부정과 왜곡을 둘러싼 시비가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지금도 분단과 전쟁을 일으킨 적대 구조와 그 여파가 지속되고 있다. 최근 집권세력의 통치행태를 보며 새삼 목도하고 느끼는 것이지만, 그 구조와 여파의 영향은 ‘시간의 부식 효과’라는 말을 무색하게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8·15 경축사와 국방부의 최근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흉상 철거 시도를 볼 때에도 그렇다. 다시금 반공주의를 내세워 배제의 대상과 적을 호명하고 있다.

시간의 부식 효과란 분단과 전쟁을 겪었던 정치·사회적 집단 간의 좌·우파 간 이념적 적대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약해지고 결국 사라지게 된다는 뜻이다. 분단과 전쟁 시기와 이념갈등을 실제 겪어 좌·우 간 이념적 적대 성향이 유독 강한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 세대’의 별세를 염두에 둔 말이기도 하다. 한국의 인구 구성상 분단과 전쟁 과정을 경험한 세대(적어도 1940년대 초 태생인 80대)의 비중이 현저히 작아진 것은 맞다. 80대 인구는 2023년 국가통계포털 기준 전체 인구의 4.54%(총인구 5100만명 대비 약 23만명)에 불과하다.

반공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민주화운동 세력을 ‘빨갱이’로 몰며 탄압했던, 또 민주화 투쟁을 사회주의 이념에 기대 수행했던 군부 독재정권 시기가 끝나고,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이 시작된 1988년에는 출생년 기준 ‘분단-전쟁 세대’(40대 이상)가 전체 인구 중 25% 정도(총인구 4200만명 대비 약 1050만명)였다.

‘시간의 부식효과’라는 말이 무색

그런데 휴전 이후 70년이 지나 분단-전쟁 세대가 현격히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1988년부터 현재까지 이념의 자유와 그것에 대한 포용성이 신장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그래서 이념 균열과 갈등의 영향 강도와 동원 정도가 약화될 것으로 기대되는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이 35년이 지났는데도, 이념은 여전히 문제다. 현실 주요 정치세력 간 갈등의 핵심 소재이고, 정치 전략의 주요 레퍼토리다. 양대 세력 중 한 측인 집권세력은 상대방을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친북 이념을 추종한다는 혐의를 두고 공격한다. 제1야당인 다른 한 측도 집권세력에 대해 ‘(친일)매판세력=토착왜구’ 아니냐며 그리 한다.

왜 그런 것일까? 심지어 지난 35년의 시간은 현실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이념 대립) 역사의 종말’마저 선언된 때 아니었던가. 그래서 이 당 저 당 가릴 것 없이 기성 양대 정당이 탈이념을 기치로 “이념 대신 민생을” 추구하겠다고 공언해오지 않았던가.

시간의 부식 효과론은 이념을 호락호락한 것으로 봤던 것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의 적대적 이념의 강고함, 특히 반공주의에 대해서도. 이념은 한 번 만들어지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경험과 감정과 기억을 섞어 시간의 흐름을 초월해 작동한다. 즉 이념은 ‘초역사적’이다.

반공주의 역시 마찬가지다(반일·반미 민족주의도 예외가 아니다). 이념의 진짜 무서움은 여기에 있다. 언제든 맹목적 적대감을 재생산할 수 있다. 반공주의의 경우, ‘시대 초월적 재동원’에서 필요한 건 ‘공산주의자=척결해야 할 나쁜 놈’으로 딱지 붙일 대상의 존재인데, 국가권력은 이를 썩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다. 한국의 현 집권세력에게 그 대상은 실제 공산주의자인지의 여부를 떠나 전임 정권 및 방계 세력이다. 그리고 그들이 추앙하며 현재로 소환해낸 역사 속 인물이다.

반공주의를 자유주의·보수주의·사회주의 같은 이념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묻지 말자. 정치에서 이념은 체계적인 지식-담론 구조를 갖추고 있느냐의 여부보다 실제 정치 현실에서의 힘의 관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느냐가 더 중요하다. 자유주의·보수주의·사회주의가 3대 정치이념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다만 자유주의·보수주의·사회주의는 학문적 조명이 흥했지만, 반공주의는 그렇지 못했다. 반공주의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기대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즉 독자적으로 품고 있는 유토피아적 지향 가치와 질서에 대한 구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체제의 목적이 된 한국 반공주의

그런데도 굳이 이념으로서의 위상을 언급하자면, 반공주의는 선동적이고 공격적으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 및 작동 방식을 수호하기 위한 하위 이념, 즉 도구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직접세 증가와 같이 체제 기득권층의 물질적 양보를 요구하는 지방자치체의 복지정책 확대와 자유당의 사회개혁 시도를 계급투쟁과 혁명을 책동하는 불순한 이념이라는 의미의 사회주의로 몰아가며 저지하고자 했던 ‘타임스’와 보수당, 1950년대 초 미국에서 냉전 질서의 강화에 편승하거나 그것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입지와 영향력 확보의 차원에서 체제 내 비판세력을 추방하고 매장했던 매카시즘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반공주의도 그 선상에 놓여 있다. 그런데 한국의 반공주의는 좀 특별하다. 이 특별함이 한국 반공주의의 ‘색다른 무서움’을 낳는 모태다. 한국에서 반공주의는 사회체제 자체에 내장돼 있다. 체제 수립의 과정이었던 분단과 전쟁 자체가 반공주의의 장착을 위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반공주의는 체제 수호의 도구가 아니라 체제의 목적이다. 그래서 재동원의 빈도가 거의 일상적이고, 그 방식이 거세고 제도적이다. 반대세력에 대해 친북세력이라는 ‘딱지 붙이기’가 흔하고,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윤석열 정권의 반공주의를 기치로 한 이념정치의 구사는 일개 정권이 아니라, 체제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악화일로에 처한 남북관계와 개선 가능성의 희박함, 미·중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국제정세의 경색과 군사화, 전임 정권에 대한 열성적 반대자에 한정된 정권의 협소한 지지 기반과 낮은 지지율이 촉매가 돼 한층 더 거칠고 공세적으로 표출되고 있을 따름이다.

문제는 이것이 대내외 정세 상황의 특성으로 인해 나라 안팎에 걸쳐 이념적 적대감과 체제 간 대결의 위기를 동시에 키울 우려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역사와 달리 이념의 무서움만을 선사하는 역사의 순간을 다시금 목도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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