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가 불안하면 사회도 위태롭다
[시민편집인의 눈][무차별 범죄]
[시민편집인의 눈]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이 쓴 ‘불평등 트라우마’는 경제적 불평등이 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병들게 하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사회역학자인 저자들은 20여개 선진국을 나라끼리 비교하거나 미국 50개 주를 서로 비교하는 방법 등으로 분석한 뒤 이렇게 정리했다. 불평등한 사회에는 덜 불평등한 사회에 비해 정신질환자가 훨씬 많다. 따돌림 등 학교폭력이 만연하고, 마약·알코올·도박 등 중독도 더 흔하다. 살인 등 범죄로 교도소에 갇힌 인구 비중이 높고, 경호산업이 번성한다. 명품 등 과시적 소비와 성형 등 외모 관련 투자에 집착하는 사람이 많다.
이유가 뭘까. 저자들의 설명은 이렇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항상 지위 불안에 시달린다. 소득과 지위에 따라 사회적 평가와 대접이 너무 달라지니,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한다. 경쟁과 지위 불안은 심한 스트레스를 낳고, 육체와 정신을 압박한다. 이를 견디지 못해 은둔을 선택하거나, 도를 넘는 자기과시로 대응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심각한 스트레스와 좌절은 우울증·조현병 등 정신적 증상이나 마약·알코올 등의 중독으로 종종 이어진다. 학교에도 사회상이 투영돼 경쟁·갈등·폭력이 만연하니 아이들의 행복감은 추락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통합 대신 ‘구분 짓기’가 지배적이므로, 뒤처진 개인은 소외감에 빠진다. 가족·친구 등 사회적 연결까지 단절되는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이를 해치는 범죄로 폭발하기도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은 한국의 자살률과 최근 급증한 무차별 범죄는 ‘불평등 트라우마’의 설명을 곱씹게 한다. 토마 피케티 등 불평등 연구자들이 활용하는 ‘상위 10% 소득집중도’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선진국 중 미국 다음으로 불평등한 나라다. 물론 서울 신림동과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 등에서 일어난 무차별 범죄를 불평등한 경제사회구조 탓만으로 돌린다면 섣부른 일이 될 수 있다. 각 사건에는 하나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맥락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연구는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 ‘다 죽이고 나도 죽고 싶다’ 등의 극단적 일탈이 늘어날 것을 짐작하게 한다. 불평등이 더 심해진다는 것은, ‘성냥불만 그으면 폭발할 기름탱크’ 같은 사회로 가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해법은 없을까. 윌킨슨과 피킷은 ‘경제민주주의를 통해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불평등을 없앨 수는 없지만, 소득과 지위 격차의 피라미드를 좀 더 완만한 기울기로 만들 수는 있다는 것이다. 특히 피라미드 아랫부분에 있는 대다수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해서, 자본가 등 부유층과 간격을 좁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노동조합 조직률과 협상력을 높일 것, 기업 이사회 등에 노동자 대표를 참여시켜 임금 격차를 줄이고 의사결정의 질을 높일 것 등을 제안했다. 또 누진세 강화와 조세회피처 규제 등으로 세금을 더 걷어 복지 등 사회안전망을 튼튼히 하는 것, 노동시간을 줄여 실직자 등과 일자리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 정부의 행보는 이런 제언과 거꾸로 가고 있다. 화물노조 파업과 건설노조 사태, 노조 회계공시 논란, 주당 최장 근무시간 연장 시도, 최저임금 인상 억제, ‘시럽급여’ 파동 등은 아등바등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좌절을 안기고 있다. 지금도 살기 어려운데, 앞으로 더 힘들겠다는 절망감이 커진다. 반면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깎아주기 등 대기업과 자산가들이 흡족해할 일들은 이어지고 있다. 일상의 평온을 뒤흔든 무차별 범죄에 정부가 내놓은 대안은 장갑차 출동 등 경찰 무장 확충과 처벌 강화 등이다.
불평등 피라미드가 더 가팔라지게 된 이 시점에, 언론은 뭘 하고 있을까. 일부 언론은 정부와 함께 노조 때리기에 여념이 없고, 일부는 무차별 범죄를 선정적으로 다루거나 처벌 방안 등 지엽적 논의에 매달리고 있다. 한겨레는 평소 노동 보도를 적극적으로 해왔고, 무차별 범죄 대응책의 문제점도 균형 있게 짚었다. 그러나 불평등 구조라는 거대한 빙산과 무차별 범죄라는 일각, 경제·노동정책을 통합해서 보는 접근법으로 근본적인 대안을 끌어내고 정부·정치권 대응을 압박하는 역할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한겨레를 포함한 언론의 분발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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