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모셔올 자격이 있었나
[뉴스룸에서][윤 정부 ‘역사 쿠데타’]
[뉴스룸에서] 김진철 | 문화부장
1923년 12월5일치 누렇게 바랜 ‘독립신문’ 1면. ‘슬프다 칠천의 가련한 동포가 적지에서 피바다를 이루엇다’라는 제목 아래로 ‘아프고도 분하도다 원수에게 죽은 동포…’라며 기사가 이어진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일본 정부가 퍼뜨린 유언비어에 놀아난 ‘자경단’들은 닥치는 대로 조선인의 목을 베고 몸을 찔렀다. 그해 12월에 이르러 독립신문은 조선인 사망자가 6661명이라고 기록했는데, 독일 외무부 보고로는 2만3058명이 죽었다. 100년 세월이 흘렀지만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원혼들이 구천을 떠돈다. 일본 정부는 사과는커녕 학살 사실마저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진상 규명조차 요구한 적이 없다.
한국 정부의 친일 행보가 일본을 그렇게 만들었다. 해방 이후 지금껏 풀리지 않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윤석열 정부는 일거에 정리해 버렸다. 오랜 시간 아슬아슬하게 전략적 균형을 잡아온 한국은 마침내 외교적 공간을 스스로 좁히며 미·일이 중·러에 맞서 주도하는 신냉전 구도의 한 축으로 걸어 들어갔다. 국민 건강과 직결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한국 정부가 용인한 것은 앞으로도 믿어지지 않을 일이다.
일본은 이제 거칠 것이 없다. 일본 재무장은 이미 가속하고 있으며 강제동원 현장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이나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거나 신사에 공물을 보내는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이 사태가 독도에까지 이르는 게 아니냐는 ‘괴담’마저 항간에 퍼지고 있다.
‘친일 정부’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데 대통령은 국민을 설득하기는커녕 “공산전체주의 세력” 운운하며 맞서고 있다. 공산주의 세력과 추종 세력, 반국가 세력이 활개 치며 우리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한다. 방송통신정책을 좌우할 인사가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공산당의 신문이나 방송”이라고 낙인찍는 일까지 벌어진다. 오랜 세월 군사·독재·수구세력이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온 ‘빨갱이’와 ‘종북세력’이란 고전적 표현이 부활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의 무장독립투쟁보다 공산당 가입을 들춰대는 한편에서 백선엽은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간도특설대 장교 이력은 놔두고 한국전쟁에서 북한과 맞서 싸운 경력만 강조된다. 머잖아 홍범도 흉상이 사라진 육군사관학교 교정에는 백선엽 동상이 자리 잡을 참이다. 뉴라이트가 ‘종북좌파’라고 매도하는 백범을 몰아내고 독재정치와 부정선거로 쫓겨난 이승만을 ‘국부’로 추어올리는 작업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간토대학살 이후 일제는 사회 혼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치안유지법을 만들었다. 이 법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데 이용됐다.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조선인을 모조리 잡아 천황제를 흔들고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공산주의·사회주의자들이라 규정해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다. 1925년 제정 당시 최고 10년 징역 또는 금고형이었던 처벌 수위는 이후 최고 사형으로 강화된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은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 총사령부 명령으로 폐지되지만, 그로부터 3년 뒤 한국에서는 여수·순천사건 직후 국가보안법으로 부활한다. 여순사건 때 반공주의 노선을 내세워 철권통치를 강화한 이승만 정부는 정부 비판을 공산주의 세력과 추종 세력, 반국가 세력의 행위로 몰아 제압하기 위해 일제가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악법을 이용한 것이다.
간토대학살 100년이 되도록, 이토록 참혹한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도 알려 하지 않는 가운데, 아직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는 이 나라에서, 공산당 가입 전력을 들어 홍범도 장군 흉상이 철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자유를 압살하는 국가보안법조차 폐지하지 못한 나라에서 홍범도 장군 유해를 모셔올 자격은 없었던 것이다. 치안유지법으로 독립운동을 탄압했듯 살아남은 국가보안법이 다시 칼춤을 출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한 이 나라에서 아직도 반국가 세력을 운운하는 정치지도자가 100년 전 과거사는 묻어두면서 100년 전 독립운동가의 공산당 가입 이력을 파헤쳐 매도하는 일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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