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외도했던 사흘의 시간, ‘대투수’의 시야를 바꿨다… 리프레시의 힘, 전설 향해 나아간다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양현종(35‧KIA)을 수식하는 단어는 수없이 많겠지만, 그중 하나는 바로 ‘책임감’이다. 꾀를 부려본 적이 없는 선수다. 선발 투수라면 로테이션을 빠지지 않고 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신념을 지키려 노력했던 선수다.
그 과정에서 KBO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경력이 쌓였다. 4일 현재 KBO리그 1군 통산 2281이닝을 던졌다. 2014년 171⅓이닝을 소화한 이래, 지난해까지 8시즌 연속 170이닝 이상을 투구했다. KBO리그 역사에 없었던, 오직 양현종만 가지고 있는 훈장이다. 그렇게 성실하게 던지는 가운데 166승을 거뒀고, 훗날 KBO 명예의 전당이 생긴다면 첫 턴에 입성할 수 있는 이정표를 만들어냈다.
양현종도 이제 30대 중반이다. 돌도 씹어 먹던 20대가 아니다. 체력 관리의 필요성이 더 커진 시기다. 그래도 먼저 쉬겠다고 말한 적이 없는 선수다. 양현종은 1일 인천 SSG전이 끝난 뒤 “이닝을 많이 던지고 싶다. 최대한 중간 투수와 그 다음 선발 투수에게 부담을 안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거기에 맞춰서 하려고 했다”고 했다. 그러나 어쩌다 찾아온 한 번의 휴식은, 그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완고했던’ 양현종의 시선을 조금 바꿔놓고 있는 것 같았다.
후반기 개막을 기점으로 양현종의 투구 내용은 하락세를 그렸다. 구속도 떨어지고, 세부적인 트래킹데이터에서도 한창 좋을 때보다는 못한 수치가 찍혔다는 게 김종국 KIA 감독의 설명이다. 그렇게 난타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자 코칭스태프가 휴식을 제안했다. 앞으로 시즌 마지막까지 달려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었다. 차라리 지금 쉼표를 잠시 찍고, 뒤를 보자는 권유였다.
아마도 3~4년 전만 해도 양현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로테이션에 남아 경기력을 정상화하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음이 움직였다. 양현종은 “더 이상 참고 던지는 게 정말 팀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도 조금 쉬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털어놓으면서 “감독님, 코치님께서도 ‘못해서 내려가는 게 아니라, 너무 지쳐 보인다. 조금 쉬어라’고 말씀해주셨다”고 이례적이었던 당시를 떠올렸다.
급한 팀 사정상 휴식을 오래 줄 수는 없었다. 양현종의 휴식을 배려한 코칭스태프도 ‘열흘’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그 열흘, 아니 첫 3일은 양현종의 시야를 조금 넓혀놓는 계기가 됐다. 한 번 던지고, 5일 뒤 다시 등판할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됐다. 프로 경력에서 정말 오래간만에 있는 정서적 홀가분함이었다. 첫 3일은 야구장에도 나가지 않았다. 스파이크도 신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랬더니 세상이 조금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장에서 눈앞의 적을 신경쓰느라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현종은 “야구장도 나가지 않고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 TV로 야구를 보면서 이제 그라운드로 빨리 복귀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2군에서 열심히 훈련하는 어린 선수들을 보면서 옛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초심을 돌이켜봤다. 양현종은 ‘힐링’이라는 말로 그 기분을 정리했다.
각오도 되새겼고, 동기부여도 다시 생겼다. 자신의 이탈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준 동료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힘을 내야 했다. 다행히 휴식 후 결과가 좋았다. 8월 26일 광주 한화전에서 6이닝 2실점으로 잘 던졌다. 고비를 넘겼다. 1일 인천 SSG전에서는 7이닝 2피안타 무실점 역투를 펼쳤다. 아마도 경기 내용만 보면 올 시즌 가장 좋은 등판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리프레시의 힘이었다. 어쩌면 고집스러웠던 양현종도 그 힘을 느꼈을 법하다.
앞으로도 책임감을 불태우겠지만, 때로는 ‘돌아가는 방법도 있기는 하구나’는 것을 잠시 메모했을 양현종이다. 목표를 향해 가는 네비게이션 경로에 옵션이 하나 더 생겼다.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지 모른다. 기운도 차렸으니 이제 팀을 위해 전력투구할 때다. 최근 8연승의 신바람을 타고 4위까지 오른 KIA지만, 아직 고비는 숱하게 남아있다. 양현종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도 전설들을 향해 계속 달려간다. KBO리그 역대 다승 2위(166승)에 올라선 양현종은 선발승(164승)만 따지면 역대 1위였던 송진우(163승)를 넘어섰다. KBO리그 역사상 양현종보다 더 많은 선발승을 기록한 선수는 이제 없다. 역대 소화 이닝(2281이닝)에서도 2위 정민철(2394⅔)을 계속 추격하고 있다. 1913개의 탈삼진은 역대 2위로, 1위 송진우(2048개) 추격을 계속 한다.
사실 다승, 이닝, 탈삼진은 앞으로 건강하게 뛰면 언젠가는 다 경신할 누적 기록들이다. 양현종이 욕심을 내는 건 이강철 현 kt 감독이 가지고 있는 10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다. 양현종은 지난해까지 8년 연속이다. 올해 7승을 기록 중이라 이 기록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올해 일단 3승을 더 거둬야 한다. 유독 기록 욕심이 없는 양현종이지만 이 기록에 대해서는 “올 시즌 (개인적) 목표는 우선 그것인 것 같다”고 인정했다.
다 팀을 위한 계산이다. 양현종이 남은 등판에서 3승 이상을 거둔다는 자체는, KIA의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조금은 더 넉넉한 마음으로 포스트시즌 홈팬들을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순위에도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보 후퇴에서 이보 전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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