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로이트 글로벌 경제 리뷰] 인플레이션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 어떻게 볼까
인류 역사 초기부터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촉매 요인이 전반적이고 지속적인 물가 상승, 즉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 고대 로마제국은 주화 가치 절하로 수 세기간 물가가 상승했고, 유럽은 스페인이 남미산 은을 수입하면서 한 세기 이상 인플레이션이 지속됐다. 독일은 1920년대 초 악명 높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사태의 근본 원인은 동일하다. 경제활동에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화폐가 창출된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통화량과 인플레이션 간 상관관계가 무너지면서 이러한 이론이 힘을 잃고 있으며, 새로운 해석과 인플레이션 통제법이 제시되고 있다. 아직은 연방준비제도(연준·Fed)를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이 새로운 해석을 수용하지 않고 있지만, 이들 생각도 언젠가 바뀔 수 있다.
화폐 발행과 임금-물가 악순환
1970년대 이후 경제학자들이 신봉해 온 정설은 화폐 발행이 물가 상승을 촉발하며 이를 억제하지 않으면 장기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1│통화 당국이 경기 하강을 타개하기 위해 화폐를 ‘찍어내’, 은행·기업·가계 등 경제 주체 손에 쥐어 준다.
2│저금리에 쏟아지는 현금을 손에 쥔 기업들은 (저수익) 투자를 대대적으로 단행한다. 이로 인해 인건비를 중심으로 투입 물가가 상승한다.
3│임금이 상승하면 가계의 구매력이 강해진다.
4│수요가 (생산능력을 상회하는 수준까지) 증가하면서, 기업들이 원가 상승분을 상쇄하기 위해 가격을 인상한다.
5│물가 상승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실질소득 감소를 막기 위해 임금 인상을 요구한다.
6│기업들은 임금 인상 부담을 상쇄하기 위해 가격을 더 올린다.
7│다시 3~6번이 반복된다.
8│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경기 침체 우려에 신용 공급의 고삐를 죄지 않으면, ‘임금-물가 악순환(wage-price spiral)’이 발생한다.
이러한 교과서적 해석은 대략 1965년부터 1990년까지 대세 이론이었으나 이미 1980년대부터 이 해석이 실제와 다르다는 의구심을 제기하는 경제학자들이 꽤 많았다. 첫 번째 문제는 바로 화폐 공급(통화량)이다. 그림을 보면 1980년대 통화량 증가와 인플레이션 사이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통화량 증가율로 보자면 인플레이션율은 훨씬 높았어야 했다. 또 1990년대 후반에 통화량 증가율이 급격히 떨어진 후 2000년대에 다시 크게 치솟았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은 그만큼 큰 변동을 보이지 않았다. 1980년 이후 금융 규제가 완화되자 시장이 새로운 금융 및 저축 상품들을 대거 발명해, 통화량을 정확히 측정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처음에는 협의의 통화 M1부터 광의의 통화 M3까지 통화량 측정을 정교화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1990년쯤 되자 이론적 개념으로는 정책 의도에 걸맞게 통화량을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됐고, 통화량 조절로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연준의 실험은 사실상 1980년대 초에 끝났다. 대신 연준은 단기금리를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면 금리를 인상한다’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여전했다.
21세기의 인플레이션 양상
실제로 지난 20년간 ‘통화량이 늘면 임금과 물가가 상승한다’는 정설을 깨뜨리는 증거가 다수 나타났다.
1│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실업률이 이전 두 차례의 경기침체 때보다 두 배 가파른 속도로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그만큼 하락하지 않았다.
2│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연준이 통화량을 대폭 늘렸음에도, 인플레이션율이 높아지지 않았다.
3│2010년대 말 실업률이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임금 상승세가 가속화하지 않았다.
코로나19를 계기로 통화량이 더 가파르게 늘어, 2020년 2분기에는 무려 13%나 증가했다. 약 1년 후 인플레이션율이 실제로 급등하기는 했으나 그 단초는 고용 시장 경색이라기보다는 공급망 이슈라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 실제로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발발 후 실질임금은 약 5% 하락했다. 실업률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노동시장 경색이 심화됐음에도 임금이 오르지 않은 것이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다른 이론들
짐바브웨와 아르헨티나처럼 지속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율은 분명 통화량이 극도로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 시스템이 복잡하고 인플레이션율이 10%를 넘지 않는 선진국에서는 통화량-인플레이션, 고용 시장-인플레이션 간 관계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현재 주목할 만한 새로운 해석은 다음 두 가지다.
1│현대통화이론(MMT)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케인스주의 거시경제 모델을 대체하는 이론으로 부상하고 있다. MMT는 통화량 대신 광범위한 수요를 인플레이션 촉발 요인으로 제시하며, 통화정책보다 재정 정책이 인플레이션 통제와 완전고용 달성에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른 인플레이션 억제법은 제한적 재정 지출+정부 세수 정책 조합과 함께 완전고용을 유지하는 것이다.
2│반독점 및 경쟁 관련 최근 연구에서는 ‘임금-물가 악순환’ 대신 ‘이윤-물가 악순환(profit-price spiral)’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경쟁이 줄면 기업들은 원가 상승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가격을 인상하고 이윤 마진을 늘리게 된다. 이에 따르면 반독점 규제를 강화하면 물가 억제 효과를 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새로운 해석을 계속 시도하고 있지만, 연준을 비롯한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전통적 패러다임을 계속 따르고 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중앙은행 정책 입안자들은 결코 통화정책을 위험한 방식으로 운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새로운 이론은 대부분 아직 검증을 거치지 않았으며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다.
하지만 중앙은행 정책에 인플레이션이 계속 예상을 빗나가는 방식으로 반응하면, 일부 경제학자들은 통화정책 운용 방법을 바꿔야 하는 이유에 대해 지금보다 탄탄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실질적 변화가 이뤄지려면 수년, 혹은 한 세대가 걸릴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이 큰 거시경제학자의 유명한 인용문으로 글을 맺으려 한다.
“대부분 사람은 25~30세가 넘으면 새로운 이론을 좀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공무원과 정치인, 심지어 선동가들이 현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낡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위험한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아이디어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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