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 달아오른 中 반도체 소부장 생태계…팹리스·후공정은 세계 수준
올해 6월 코로나19로 4년 만에 열린 중국 최대 반도체 전시회 ‘세미콘 차이나’에 다녀왔다. 반도체 불경기 속에서도 1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예년 6만 명에 비해 큰 폭으로 방문객이 늘었는데, 부스만 2만 개가 팔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몇 년 전까지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미국과 일본 기업들은 눈에 띄게 줄었고, 그 자리를 중국 회사들이 차지했다. 수천 개의 중국 기업은 지난 몇 년간 새롭게 개발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를 전시하며 기술력을 뽐냈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화두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반도체 지원 정책’이었다. 특히 중국 소부장 기업들의 부상이 눈에 띄었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시국 동안 중국의 반도체 팹(공장), 장비, 부품 회사들은 괄목상대(刮目相對)하게 성장했다. 반도체 공급난으로 적자에 허덕이던 상당수의 중국 반도체 팹은 흑자로 전환했고, 소부장 회사들 중에서도 두세 배의 성장을 이룬 회사들이 허다했다. 외국 엔지니어들의 입국이 안 되자, 중국 엔지니어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으며, 대만, 일본, 한국의 엔지니어도 중국으로 많이 넘어갔다. 반도체 호황과 더불어 수많은 중국 반도체 기업이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멋진 사옥과 시설도 지었다. 중국의 첨단 반도체는 주춤하고 있지만, 레거시(구형 공정) 반도체 생태계는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中, 반도체 산업 전폭 지원
코스닥에 상장한 국내 반도체 기업의 주가수익비율(PER)을 보면, 10이 안 되는 기업들이 허다하다. 반면 중국판 나스닥인 커촹반(科創板)에 상장한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PER은 상당수가 40을 넘는다. 우리 회사 거래처 중 매출도 그리 많지 않고, 기술력과 업력이 그리 높지 않음에도 1조원 이상의 시장 가치를 목표로 상장을 준비 중인 중국 기업들이 몇 곳 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중국인의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상당하다. 중국 정부는 주도면밀하게 반도체 굴기(崛起)를 추진하고 있다. 불과 2~3년 만에 장비를 만들어 낸 중국 기업들을 찾아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장비를 만들어 냈냐’고 물었더니, 중국 정부에서 장비의 표준 플랫폼과 소프트웨어를 싼 가격에 제공했다고 한다. 자국산 소프트웨어로 장비를 만들면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해 주는 식이다. 중국의 주요 팹들이 의무적으로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시제품의 성능 평가를 해주는 셈이기도 하다.
여기에 중국산 장비를 구매하면 장비 가격의 20~30%에 이르는 보조금이 지급된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강력한 반도체 생태계 지원으로 소부장 기업들은 개발 기간을 줄일 수 있다. 반도체 장비를 만든 회사들이 재료비보다 조금 높은 가격에 팔아도 이익을 낼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수백조원의 자금이 투자됐고, 앞으로도 수백조원의 자금이 추가로 반도체 생태계에 투자될 전망이다.
요즘 한국의 웬만한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은 대부분 중국 기업으로부터 합작 투자나 투자 제안을 여러 차례 받고 있다. 부지를 제공받는 것은 기본이고, 건물과 보조금 지원까지 언급된다. 다른 나라에서는 생각도 못 할 수준의 파격적인 제안이다. 반도체 기술만 있다면 거의 자금 투자 없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수준이다.
국가 재정이 어려워 공무원 수당까지 줄이고 있는 중국은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를 키우고 있다. 기술 유출을 우려해 중국 진출을 꺼리는 국내 소부장 기업들도 많다. 그렇지만 자국에서 시장 진입이 만만치 않은 중소기업들에 중국 시장은 또 다른 돌파구이기도 하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소부장 기업들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중국에 둥지를 틀고 있는 배경이다.
중국 반도체 굴기…미·중 패권 경쟁이 변수
미·중 패권 경쟁이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치열하다. 특히 첨단 반도체 기술의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반도체는 인공지능(AI) 같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이자, 경제와 안보 모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산업이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반도체를 축으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의 전략적 목표다.
그럼에도 미국이 반도체 생태계에서 중국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미국 기업들의 반발이 나오고 있다. 또 현실적으로 세계 100여 개국이 긴밀하게 연결된 반도체 생태계에서 중국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중국은 희토류나 갈륨 같은 원자재 수출 통제 같은 보복 수단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다.
중국이 국제적 협력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개방적 생태계에서 배제돼 독자적으로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중 패권 경쟁의 핵심인 반도체를 포기할 순 없을 것이다. 중국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반도체 굴기를 지속할 전망이다. 중국은 인터넷 산업에서 독자적 생태계를 구축했듯이 반도체 산업에서도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반도체 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 올해 같은 반도체 불경기에도 한층 더 공격적으로 외국산 장비를 수입하고 있다. 물론 중국 정부의 모든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첨단 반도체 관련 수출 규제로 14나노 이하의 반도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앞으로 상당 기간 현실적으로 어렵다. 축적된 기술 없이 속성으로 만들어진 소부장 품질이 안정될 때까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반도체 소부장 공급망을 중국 내에서 독자적으로 구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중국 기업들은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후공정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떠올랐다. 특허가 만료된 8인치 장비들은 선진 장비 기업의 기술을 카피해서 꽤 쓸 만한 수준의 장비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소부장 분야에서도 진입 장벽이 낮은 분야는 중국 기업들의 약진이 두드러질 것이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위기와 기회
전시회에서 만난 한 대만 부품 회사의 대표는 2~3년 후에 중국의 기술에 추월당할 것을 걱정했다. 몇몇 한국 기업은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 걱정된다’고 푸념했다. 미·중 패권 경쟁 시대에 한국이란 나라가 새우가 될지, 돌고래가 될지도 걱정된다. 이제 작은 회사들도 미·중 반도체 디커플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만 한국의 반도체 생태계에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다행히 지난 몇 년간 일본의 무역 제재 이후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크게 성장했다. 기초체력도 강해졌다. 미국의 중국 수출통제는 중국 기업들의 무서운 추격을 막아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숨통을 틔워 주기도 했다. 경기도 남부에 만들어진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생태계가 더 강화된다면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의 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중국 기업들이 특허 문제로 내수 시장에 전념할 때, 한국 기업은 몇 배 더 큰 세계시장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세계적 수준의 한국 엔지니어들이 분발한다면 앞으로도 다른 나라들이 쉽게 쫓아오지 못할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 낼 것이다.
20세기는 석유의 시대였고, 21세기는 반도체의 시대다. 여러 나라의 반도체 산업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한국 반도체 생태계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요즘 한국의 저조한 경제성장률과 수출 현황을 보면 21세기 대한민국의 운명이 반도체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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