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잊혀질 권리 찾습니다”...불법 유포 게시물 삭제하러 無자격 디지털 장의사 찾는 사람들
자격증 없어도 디지털 장례업체 사업자 등록 가능
전문가들, “정부가 면허 발급해 교육·관리해야”
김모(29)씨는 최근 회사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글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얼마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던 사진과 사생활에 관련된 내용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출돼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가 손 쓸 새도 없이 이 정보는 다른 포털 사이트로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온갖 사이트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게시글을 삭제할 수 없었던 김씨는 온라인에서 지우고 싶은 정보를 삭제해 주는 ‘디지털 장의사’를 고용하기로 했다.
상담을 요청한 김씨에게 디지털 장례업체는 “신분증과 금액(10건당 50만원)을 먼저 지급해야 한다”고 했다. 적잖은 금액이었지만 혼자서 해당 게시물을 삭제 신고하기 힘들었던 김씨는 돈을 내고 업체에 삭제를 의뢰했다.
개인 정보 유출 사례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최근 김씨처럼 온라인에 유포된 개인 정보를 지우기 위해 디지털 장례업체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별다른 자격증 없이 ‘신고’만으로 운영되는 디지털 장의사를 이용했다가 금전적 손실을 입거나, 2차 정보 유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 ‘잊혀질 권리’의 사각지대 있는 사람들, 디지털 장례업체 찾아
디지털 장례업체에 고용된 이른바 ‘디지털 장의사’들은 고객에게서 의뢰받은 영상, 사진 등 온라인에 퍼져 있는 기록물을 지우는 일을 한다. 4일 조선비즈가 서울 시내 여러 디지털 장례업체를 취재한 결과, 온라인 게시물 삭제는 1건당 5만원, SNS 계정 삭제는 1건당 최대 10만원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게시글이 삭제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1~2주다. 2014년 설립된 A디지털 장의사 업체는 “지난 9년간 약 7만개의 인터넷 게시글을 삭제했다”고 했다.
디지털 장의사를 찾는 고객들은 원치 않는 개인 정보가 유출돼 피해를 입은 사람들, 온라인상에서 ‘잊혀질 권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피해자 본인이 자신의 유출된 개인 정보가 올라온 사이트를 일일이 찾아서 해당 사이트 운영자에게 삭제를 요청할 수도 있지만, 전문 지식이 없는 개인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모든 온라인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이를 삭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지난 4월 26일~30일 리서치 전문 기업 리얼리서치코리아가 진행한 ‘디지털(에서) 잊힐 권리’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성인남녀 5095명 중 71.0%가 “온라인에서 원치 않는 개인 정보를 없애주는 서비스를 이용할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정부에선 이러한 사회적 수요를 고려해 관련 사업을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실효성이 부족한 상황이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지난 4월부터 해당 사업의 일환으로 ‘아동·청소년 디지털 잊힐 권리 시범사업’ 서비스를 시작했다. 하지만 청소년기본법상 청소년 나이 상한인 만 24세 이하 대상에게만 적용돼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진행하는 영상물 삭제 사업도 아동·청소년만을 대상으로 한다. 경찰도 원치 않는 정보를 유포한 자를 처벌하긴 하지만, 온라인에 남아있는 게시글을 따로 삭제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시범사업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성인들은 스스로 잊혀질 권리를 찾기 위해 디지털 장례업체를 찾고 있다.
◇전문성 떨어져 2차 정보 유출 우려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자격 요건 없는 디지털 장의사들의 전문성은 신뢰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현행법상 디지털 장의사는 통신판매업자로 신고하면 별도 자격 없이 누구나 등록할 수 있다.한국직업능률개발원, 한국디지털평판관리협회 등에서 발급하는 디지털 장의사 민간 자격증이 있지만 필수 요건이 아니다.
최진응 국회입법조사처 과학방송통신팀 입법조사관은 “디지털 장의사는 인터넷상에서 의류를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과 다를 바 없다”며 “별도의 자격을 심사하는 등록 제도가 도입돼야 무분별한 사업 참여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불법 행위가 있더라도 민형사상 손해배상이나 형사처벌 등 개별법 적용만 받게 된다”고 덧붙였다.
디지털 장의사는 의뢰인의 법정대리인으로서 의뢰인 개인정보와 동의서를 받기 때문에 잊혀질 권리를 찾으러 온 의뢰인들이 또다시 개인 정보가 유출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n번방 사건에서 디지털 장의사가 음란물 사이트와 결탁해 유통을 방조했었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디지털 장의사와 같은 사이버 사립 탐정이 필요한 현시점에 맞춰 국가 차원에서 여러 방법으로 품질 통제를 해야 한다”며 “면허제나 등록제를 도입해 불법 행위를 했을 때 영업 정지와 같은 관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면허증이 있는 디지털 장의사들은 매년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고 등록 번호를 조회할 수 있도록 해 불법 행위를 저질렀을 때 추적이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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