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 검은 운석, 하얀방에 불시착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3. 9. 4.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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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쉬 카푸어 국제갤러리 展
빛의 99.965%를 흡수하는
반타블랙 사용한 대형 조각
실리콘 소재 설치작품 펼쳐
"예술의 초월성 증명하고파"
조각 'Shadow' 등 아니쉬 카푸어의 대형 작품이 설치된 국제갤러리 K3 전시 전경. 국제갤러리

700㎏의 검은 운석이 갤러리에 떨어졌다. 아니쉬 카푸어(69)의 신작 초대형 조각 4점이 설치된 국제갤러리 K3는 작가의 스튜디오를 고스란히 옮겨온 것 같다. 카푸어를 대표하는 색인 진한 빨강과 검정의 조각들은 단단하게 고정돼 벽에 걸렸다. 인체 성형에 사용되는 실리콘으로 만든 내장을, 그물처럼 보이는 유리섬유가 피부처럼 감싼 듯 보인다. 피와 살점 같은 거대한 덩어리로 물질의 육체성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그림자(Shadow)'와 '섭취(Ingest)'는 제목을 통해 작업의 맥락을 넌지시 알려준다.

인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거장 카푸어는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의 '클라우드 게이트', 런던올림픽 기념탑 등 대중을 사로잡는 스펙터클(spectacle)로 이름난 작가다. 작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아카데미아 미술관과 팔라초 만프린의 대규모 개인전을 통해 혁신적 작업 세계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최근 몰두하는 회화와 그의 대표적인 검정 작품을 병치해 시각예술의 물리적·개념적 한계를 확장하는 실험에 나섰다.

프리즈 위크에 선보이는 7년 만의 국제갤러리 개인전도 그 연장선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다. 8월 30일부터 10월 22일까지 서울 K1, K2, K3 전 공간에 걸쳐 조각, 페인팅, 드로잉 등을 폭넓게 소개한다.

작가는 '회화'를 "무언가를 가시화하는 방식에 대한 역사인 반면, 나는 그와 정반대의 일, 즉 무언가를 어떻게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천착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K2로 옮겨가면, 거대한 조각들이 좀 더 작아지고 회화의 형태로 구현된 걸 볼 수 있다. 유리섬유와 실리콘에 유화 물감이 덧칠된 물질성이 극대화된 회화다. 평면을 뚫고 나오는 입체감과 덧칠된 선홍빛 색채는 유혈이 낭자한 테러 현장 같다.

K3와 K2의 조각이 살점이 튀는 프랜시스 베이컨을 연상시킨다면, K1은 그야말로 '소멸의 회화'를 즉물적으로 보여준다. 종이에 구아슈로 작업한 평면 회화를 만난다. 육체의 내부를 드러내 보이는 방식은 회화에서도 동일하지만, 하나씩 창문이 그려져 있다. 창문이 암시하는 건, 공(空)의 영역이다. 전시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검은 조각을 만나는 K1의 안쪽 공간이다. 반타블랙(Vantablack)이 칠해진 오브제 4점은 화려한 색의 향연을 보여주던 전시를 하나의 점으로 수렴시킨다. 빛의 99.965%를 흡수하는 탄소나노 기술 소재로 만든 이 우주에서 가장 검은색은, 2016년 작가가 독점사용권을 구입해 '카푸어 블랙'으로도 불린다. 사각과 원으로 변주되는 하얀 방(White cube)의 검은 조각은 허공에 뜬 구멍, 혹은 블랙홀처럼 보인다. "물질을 통해 비물질적 형태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작가는 검은 조각을 통해 나타남과 사라짐, 현존과 부재를 표현하고, 관람객은 심연(深淵)을 응시하게 된다.

윤혜정 국제갤러리 이사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내는 예술가가 되려 카푸어는 정신분석학 공부를 40여 년간 해왔다. 최근의 작업들은 마치 예술의 초월성을 증명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개막한 양혜규의 '동면 한옥' 전시도 10월 8일까지 국제갤러리 한옥 공간에서 펼쳐진다. 작가의 대표적 조각과 평면 작업을 다채롭게 소개한다. 2006년 인천 연안부두 폐가에서 연 국내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를 떠올리게 하는 전시를 꾸몄다. 9월 4~9일 야간 관람도 가능하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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