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지우려는 윤석열 정부, 교과서도 손댈 텐가[김민아 칼럼]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학교에서 홍범도 장군(1868~1943)과 봉오동 전투(1920)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그런 평범한 시민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수십년간 온 나라가 독립전쟁 영웅으로 숭앙해온 인사의 흉상을 갑자기 철거하겠다니 말이다.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작업은 국가 정체성과 국민 자존의 문제다. 우리 사회가 어떤 삶을 장려하고 어떤 죽음을 기억할지 공표하는 결단이다. 오랜 세월 쌓아올린 역사적·사회적 합의를 기어코 깨뜨리겠다면, 정부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흉상을 철거할 명분·논리가 있는지(합리성), 철거 결정이 시민 의사를 반영했는지(민주성), 철거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질 것인지(책임성)다.
합리성. 최근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국방부 브리핑(8월29일)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국방부는 육사 내 홍 장군 흉상 이전이 필요한 이유로 △독립군들이 목숨을 잃은 ‘자유시 참변’과의 연관성 △봉오동 전투에 ‘빨치산’으로 참가 △소련공산당 활동 등 세 가지를 댔다. 모두 논파당했다.
국방부 대변인은 ‘홍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직접 참여했다’는 취지로 답했다가 기자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제가 잘못 말한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 기자들은 빨치산을 두고 “(프랑스어) ‘파르티잔’에서 넘어온 말로 비정규군을 뜻한다. 당시 군대도 국가도 없으니 독립운동한 사람은 다 빨치산”이라고 지적했다. 소련공산당 활동에 대해선 “1920년대는 레닌의 공산당이고 북한군 남침을 사주한 공산당은 스탈린 공산당으로 둘은 아주 다르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차이보다 크다”고 논박했다.
‘팩트폭격’ 당하던 대변인은 그럼에도 “(철거·이전 결정에) 외부 학계와 협의는 필요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 보수 정권에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검정에 통과시키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할 때도 최소한 학자·전문가의 허울 정도는 차용하려 했다. 해당 전문가들의 주장이 주류 학계의 통설과 거리가 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전문가 견해라는 형식적 외피조차 없이 철거를 밀어붙이겠다고 한다. 이렇게 무성의한 정권을 봤나.
민주성. 지성사 연구자인 김민철 성균관대 교수는 저서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에 썼다. “어떤 정치인이 인민의 견해에 대해 ‘너희는 틀렸으니 내 말을 따르라’는 방식으로 말한다면, 그 자신의 견해가 당대 사회 기준에서 얼마나 진보적인지 또는 보수적인지와 별개로 그는 반민주적 정치인이다. 반대로 어떤 정치인이 인민의 견해에 대해 ‘내 입장과는 다르지만 귀 기울여 듣겠다’는 방식으로 말한다면, 그 자신의 견해가 당대 사회 기준에서 얼마나 진보적인지 또는 보수적인지와 별개로 그는 민주적 정치인이다.”
지난 1일 뉴스토마토가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5.9%가 홍 장군 흉상 철거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은 22.1%였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이래도 ‘너희는 틀렸으니 내 말을 따르라’ 할 텐가.
책임성. 국방부 장관이 책임지고 결정했다고 한들 믿을 사람은 없다. 윤석열 대통령 의중이 아니라면 이토록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일 이유가 없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지난달 30일 국회에 출석해 “대통령은 ‘어떻게 하라고 얘기하지 않겠다. 다만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학계에서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거나, 전문 연구자가 통설을 바꿀 만한 논문을 발표한 것도 아닌데 ‘어떤 게 옳은지 생각해보라’는 건 “흉상을 치우라”는 지시나 매한가지다. 국방부 장관 뒤에 숨을 일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언급한 이후 이념전쟁을 가속화하고 있다. 한동안 애용하던 ‘카르텔’의 자리를 ‘이념’ 더 구체적으로는 ‘공산전체주의’가 대체하고 있다. “제일 중요한 게 이념”(8월 28일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이 반일 감정을 선동”(9월 1일 국립외교원 60주년 기념식) 등이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공산전체주의’는 전형적인 뉴라이트세력의 언어다. 2008년 뉴라이트의 핵심이던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은 한 논문에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가장 큰 특징은 공산주의 확산의 저지와 ‘공산 전체주의’와의 대결 승리를 통해 민주주의가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 보고서’(2018)에 따르면, 2015년 9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 ‘박근혜 청와대’는 편찬기준에 대한 수정 요구 21건을 담은 문서를 교육부에 전달한다. 21건 중에는 “세계사적 배경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 대결과 경쟁 그리고 그 필연적 귀결에 대해 내용이 없다. 들어가야 할 필요”라는 의견이 포함돼 있다.
윤석열 정권 요직에는 뉴라이트 인사가 다수 포진해 있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뉴라이트 싱크넷’ 운영위원장을 지내고, 뉴라이트 성향 역사교과서 집필을 목표로 한 ‘교과서 포럼’에 참여했다.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관여했다. 김광동 전 원장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뉴라이트에 둘러싸여 “늦깎이 의식화된”(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의 표현) 윤 대통령이 ‘공산전체주의’라는 정체불명 개념어에 경도되고, 그 첫번째 액션이 ‘홍범도 지우기’로 나타났을 것으로 본다.
윤 대통령을 등에 업은 뉴라이트는 전방위적 이념·역사 논쟁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도 역사교과서가 타깃이 될 수 있다. 2025학년도부터 사용될,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 절차가 12월쯤 시작된다. 박래훈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현 정부가 특정 인물이나 역사적 사건 평가에 이념적 잣대를 적용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권력으로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시도는 그러나 성공한 적이 없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 박근혜 정권의 말로가 어떠했나.
김민아 칼럼니스트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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