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건축’ 대신 ‘모두의 도시’…일 시의원, 벤치 칸막이를 없애다[시스루 피플]
일본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의 기차역인 JR히라쓰카역 서쪽 출입구 앞에는 나무벤치가 있다. 가로 263㎝, 세로 43㎝의 벤치 4개가 가로수를 둘러싸고 있는데, 평상마다 칸막이 역할을 하는 나무 돌기가 설치돼 있다. 노숙인 등이 벤치에 눕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다.
지난 7월 3일 히라쓰카시는 나무돌기를 없앤 벤치를 새로 설치했다. 벤치는 평평한 상태가 돼 누군가 눕거나 비스듬히 기댈 수 있게 됐다. 도쿄신문은 지방 정부가 나서 벤치 칸막이를 없앤 것은 최초 사례라며 여기에는 에구치 도모코(47·사진) 시의원의 노력이 있었다고 4일 전했다.
에구치 의원은 지난 5월 한 시민으로부터 “벤치가 낡고 앉을 수가 없게 돼 있다”는 연락을 받고 시에 수리를 요구하면서 고치는 김에 칸막이를 없애자고 제안했다. 대학 시절 미술을 전공하고 노숙인을 돕는 활동을 해온 에구치 의원은 지역 언론사 등에서 일하다가 27세이던 2003년 ‘무소속당’으로 시의원에 당선됐다. 현재 5선 의원이다.
그는 “1990년대 버블붕괴 이후 노숙인이 늘면서 칸막이를 설치한 벤치(배제 벤치)가 늘었고 그때부터 악의적이라고 느꼈지만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시에 칸막이 제거 요구를 관철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벤치 칸막이를 비롯해 노숙인 등을 배제하기 위해 설계한 공공 디자인을 ‘적대적 건축’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2020년 11월 도쿄 시부야구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64세 노숙인 여성이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적대적 건축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NHK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당시 정류장의 벤치에도 칸막이가 있어서 이 여성은 잠을 자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여성을 살해한 46세 남성은 “노숙인에게 거리 청소를 해야 하니 떠나 달라고 했지만 응하지 않아 화가 나서 돌을 넣은 비닐봉투로 때리면 아프니까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적대적 건축이 노숙인을 거리의 불순물로 보고 치워야 한다는 생각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힘을 얻었다. 1982~1983년 요코하마시에서도 청소년들이 부랑자를 습격한 일련의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청소년들이 “거리 청소”라며 범행을 정당화했던 사실도 다시 조명됐다.
이가라시 다로 도호쿠대 교수는 지난해 출간한 <누구를 위한 배제 아트? 불관용과 자기책임론>에서 1995년 옴 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 사건을 계기로 보안 의식이 높아지면서 적대적 건축이 많아졌다고 진단했다. 돈을 내고 서비스나 상품을 구매한 소비자가 아니라면 도시에 체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가 생겼고, 공공공간마저도 선택된 사람만이 사용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됐다는 것이다.
2021년 4월에는 도쿄도 주오구 교바시 빌딩가에 설치된 벤치에 대한 논란이 트위터에서 벌어졌다. 예술가들이 2020년 도쿄 비엔날레와 연동해 사람, 거리, 예술을 연결한다는 취지로 벤치를 설치했는데, 인근 빌딩 관리자가 “노숙인이나 청소년들이 점령할 우려가 있다”며 벤치에 칸막이 설치를 요구한 것이다. 예술가들은 반대했지만 결국 타협책으로 움직이는 칸막이를 설치해야 했다. 이처럼 일본에서 벤치 칸막이는 하나의 상식이 돼 있다.
하지만 에구치 의원은 낙관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는 “칸막이 제거 두 달이 지난 현재까지 클레임(항의)이 들어오지 않았다”며 “지금까지 노숙인은 방해꾼 취급을 받았지만 사회가 고령화하는 가운데 약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아닌가라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는 “칸막이 있는 벤치가 진부하게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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