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보내준 머리털 한 가닥, 나는 아직 유효하다 [본헌터㉑]
엄마 품에 안겨 끌려간 나, 돌쟁이 주화는 지금 어느 산 어느 구덩이에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주화다.
지구상에서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 친오빠조차 몰랐다고 했다. 완전히 잊힌 존재였다. 식구들도 많고,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사는 처지에, 게다가 전쟁 난리통에 아이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섭섭했다. 섭섭해서, 죽어서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흔적조차 세상에 없지만, 그래도 내 이름 석자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애초에 이름조차 안 지어졌던 걸까. 오래 전에 이별한 부모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내가 살아있던 아주 짧은 시간, 나는 무엇으로 불리었을까. 애기? 막둥이?
오빠가 내 이름을 찾아냈다. 내가 세상을 떠난 지 67년 만이었다. 미국으로 떠났던 오빠가 2018년 한국의 주민센터에서호적등본을 뗐다고 했다. 돌쟁이 여동생에게도 이름이 있었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고 했다. 주화. 1949년 10월20일생. 내 이름을 지어 당당하게 호적에 올려준 부모님께 영혼을 담아 감사드린다.
나는 충남 아산시 배방면 장재리 580번지에서 태어났다. 천안과 온양온천 사이 모산의 쑥고개라는 곳 근처였다.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벼농사와 밭농사를 짓는 집안이었다. 이런 가족이 20가구 정도 마을에 살았다. 그러나 1951년 1월 초에 그 사건을 겪고 뿔뿔히 흩어졌다. 오빠는 50년 전인 1973년에 미국으로 갔다지만, 나와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어디에서 죽었는지, 내 썩은 육신의 거처가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신세다.
성재산인가. 성재산에서는 10살 이상의 건장한 남자들 위주로 발견되었다. 성재산의 교통호는 2.2㎞나 되고 묻힌 사람들도 수백명이 넘는다니까 나같은 아기가 앞으로 나올 수도 있다. 아니면 설화산인가. 설화산에서는 엄마와 아이들의 뼈가 많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내가 끌려간 곳으로부터 설화산은 너무 멀다. 성재산이 훨씬 가깝다. 산에 끌려간 시간에 따라 다른 곳에 묻혔을 수도 있다. 살아남은 친오빠는 처음에 설화산에 가보고, 설화산만 생각했다. 아니다. 성재산일 수도 있다.
내 이름을 찾아준 오빠의 이름은 주성이다. 만 일곱살, 국민학교(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 경준(31), 어머니 봉희(29)를 잃은 불쌍한 오빠다. 큰아버지 선준(33), 삼촌 세준(20), 광준(15), 고모부 칠영(34), 그리고 고모 두 명과 아이, 나까지 8명도 잃었다. 일가친척 10명이 사라진 것이다. 처음에는 큰아버지 선준과 아버지 경준, 고모부 칠영만 끌려갔다. 두 손이 삐삐선에 묶여 끌려가는 광경을 오빠가 목격했다. 성재산의 유해들에게서 발견된 그 검고 굵은 삐삐선 말이다. 그 뒤 나머지 일가족과 인근의 마을에서 지목된 사람들이 어느 곡물 창고에 끌려왔다. 오빠는 양철로 된 창고였다고 기억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국군과 미군은 압록강 근처까지 진격했지만, 중공군에 밀려 퇴각하고 있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이 지역을 수복했던 경찰과 치안대원들은 다시 인민군이 내려올까봐 두려워했다. 설마 우리 가족 같은 사람들이 인민군·중공군과 힘을 합쳐 보복할까봐 미리 죽이려 했던 것일까.
창고에 잡혀온 사람들은 200여명이나 되었다. 오빠는 그곳에서 하루를 지내다 사촌형 성무(11), 동네 형 웅재(11) 등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한 집에서 10살 아래 아이들을 한 명만 내보내준다는 조치에 따라서였다. 10살이 넘어도 그 집 어른들이 눈치를 줘 나가게 했다.
엄마 품에 안겨있던 창고 풍경은 지옥이었다. 엄마와 가족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매타작이 끊이지 않았다. 청년단원들이 장작개비로 손목이 묶인 사람들을 때렸다. 신음 소리, 우는 소리가 모든 이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때 오빠는 옆 향토방위대 사무실에서 밤을 새면서 이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를 안고 있던 엄마도 때렸을까. 엄마는 울면서 기도를 했다. 찬송가를 읊조리기도 했다. 엄마의 간절한 기도는 소용 없었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우리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어둠 속에서 논두렁 사이를 지나갈 때 큰엄마가 탈출을 모의했다. 엄마는 응하지 않았다. 남편도 죽고, 먼저 나간 큰아들 오빠 주성도 죽었다고 여긴 모양이다. 하늘에서 가족들을 만나겠다면서 이승의 삶을 체념했을까. 엄마는 나를 업고 그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가만 반복해서 불렀다. 큰엄마는 아들 주호(5)를 업고, 딸 주순(12)은 나의 언니 주연(5)을 업고 논두렁 밑으로 뛰어내려 옆집 변소(화장실)로 숨었다. 누군가 황급히 따라갔지만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탈출은 성공했다.
큰엄마는 천안 광덕면 지장리 친정으로 찾아갔지만 친정아버지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했다. 목숨을 걸고 찾아온 딸에게 아버지가 “문 앞에 발만 디디면 다 죽는다. 빨리 나가라”고 하는 비정한 시절이었다. 밥 해주면 죽이고, 재워줘도 죽이던 때였으니까. 우리 가족과 친척이 끌려간 것도 이장이었던 큰엄마 집에서 인민군이 개를 잡아먹고 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의 찬송가 구절처럼, 나는 요단강을 건넜다. 총을 맞고 건넜을까, 몽둥이를 맞고 건넜을까. 놈들은 울음소리가 귀찮다며 나까지 조준해서 쏘았을까. 아니면 숨을 거둔 엄마 옆에서 울다가 생매장되었을까.
미국 메릴랜드에 건너가 슈퍼마켓으로 나름 성공을 거둔 오빠는 언제부턴가 내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 괴로웠다고 했다. 1982년 ‘소피의 선택’이라는 영화를 보고나서였다. 메릴 스트립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두 아이 중 하나를 가스실에 내몰아야 하는 엄마를 연기했다. 엄마가 죽은 아이의 환청에 시달리는 장면이 나올 때부터 나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오빠는 엄마 품에서 울면서 죽어가는 나를 떠올릴 때 미칠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오빠의 귓전에 다가와 꽥꽥 울었다고 했다.
오빠는 아산의 탕정면 모종리라는 곳에서 큰엄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큰엄마와 함께 탈출해 살아남은 언니 주연은 사촌할아버지에게 맡겨졌다. 유일하게 끌려가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가족과 논밭도 다 빼앗긴 채 다른 마을 동생네로 갔다가 1년 뒤 술병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빠는 큰엄마네 집에서 농사꾼이 돼야 했다. 집안에서 젤 큰 남자아이가 오빠였다. 논 반 마지기, 밭 300평을 일궜다. 11살 때 일을 하러 나간 어느날 온양온천국민학교에서 아이들이 수업하는 풍경을 유리창 밖으로 멍하니 보았다고 했다. 자기도 모르게 교실에 들어가 맨 앞줄에 앉았다고 했다. 선생님이 누구냐고 묻자 그냥 울어버렸다고 했다. 3학년 9반 교실이었다. 본래 5학년이어야 할 오빠는 그날부터 3학년이 되어 학교에 다녔다. 친구들이 버린 토막연필을 붓글씨 대에 끼우고, 버려진 종이를 모아 실로 꼬매 공책을 만들어 쓰고, 헌 교과서를 구해 새책과 틀린 부분을 고치며 썼다. 그렇게 온양온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온양중학교를 졸업했다. 배움은 거기까지였다.
오빠는 지난해 머리털 한 가닥을 뽑아 한국에 보냈다. 2018년부터 아산에서는 한국전쟁기 희생자에 대한 유해발굴이 시작되었고, 유해와 유족에 대한 유전자 감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빠는 2018년 우연히 뉴스에서 설화산 유해발굴 소식을 듣고 한국에 와서 현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208구의 유해가 나오는 장면을 목도한 뒤부터, 주민센터에서 내 이름을 알게 된 뒤부터 신기하게 내 울음소리 환청이 뚝 그쳤다고 했다. 대신 몸이 심하게 아파 미국에 가자마자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나는 내 이름을 찾기 위해 오빠의 달팽이관에 수십년간 그토록 매달려왔는지도 모른다.
오빠가 한국에 보낸 머리털 한 가닥으로 우리 가족은 뼛조각으로나마 재회할 수 있을까. 성재산의 교통호에서 곧 유해발굴을 재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빠의 머리털 덕분에 아직 나는 이 우주에서 유효한 존재다. 딱 머리털 한 가닥 100㎛(마이크로미터), 0.1㎜만한 희망은 버리지 않았으니까.
<다음 회에 계속>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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