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홍범도의 예언? “배신자로 경멸받기보단 죽음이 낫다”
윤석열 정부‧여당과 보수 언론은 홍범도 장군(이하 호칭 생략)에게 ‘자유시 참변’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홍범도가 참변의 가해자들 편에 가담했고, 피해자들을 재판했으며, 심지어 ‘공산당 수괴’인 레닌을 만나 가해자를 옹호했다는 식이다. 이런 주장 혹은 ‘기대’를 ‘역사적 사실’로 입증하진 못했다.
이런 와중에 이철규 국민의힘 사무총장(의원)이 ‘월척’을 낚았다. 국내의 한 논문(2021년 발표)에서 인용된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라는 당시 문건을 발견한 것이다.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5명의 명의로 발표된 이 문건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의 수적(讎賊 : 원수인 적)은 자못 일본침략주의자뿐 아니라 동족 사이에도 있나니라. 자세히 말하면 관료 및 유산자이며 홍(紅)〇와 같은 외홍내백(外紅內白 : 겉으로는 붉지만 속은 하얀)한 가면 공산당원들이로다.”
이철규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9월3일)에 소감을 남겼다. “(홍범도는) 속까지 붉은 공산당원이 아니면 우리 민족까지도 적으로 돌렸습니다. 볼세비키즘을 신봉하고 동족을 향하여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적으로 돌렸다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군의 사표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해당 논문 저자의 명예를 위해 덧붙이자면, 이 의원의 소감은 논문의 전반적 취지와 많이 다르다. 그러나 문제의 문건이 실존하며, 홍범도 등 5인의 명의로 발표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의원은 자료들을 좀 더 찾아 읽어야 했다. 해당 논문 이후 발표된 다른 연구자의 논문에, 이 의원의 감회를 뒤엎을 만한 당시 자료가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시 참변과 얽힌 여러 세력들
해당 자료를 검토하기에 앞서, 당시 상황과 얽힌 여러 세력들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1920년대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극동 지역(한반도로부터는 북쪽과 북동, 북서쪽의 러시아 영토)엔 수많은 한인 이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무장독립단체도 여럿 구성되어 볼세비키의 군대(적군)와 연대해 일본군(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발발한 내전에서 왕당파 백군을 지원)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런 러시아 내 항일 무장 독립군들 가운데 대다수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는 세력으로 형성된다. 참변의 가해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다.
러시아 지역의 한인 무장 독립군 중 소수(니항부대)는 ‘이동휘(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제2대 임시정부 국무총리이며 ‘조선인 중 두 번째 볼셰비키'로 알려진) 세력’과 결합하면서 ‘상해파’로 불렸다. 참변의 피해자들이다.
자유시 참변은 좌익들이 우익 민족주의자를 학살한 사건이 아니다. 양측 모두 민족주의자였고, 상당수는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군사‧경제적 지원을 기대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소비에트 러시아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중요한 국가였다. 임시정부 역시 레닌 정부에 특사를 보내 협력 방안에 합의했다.
보통 이르쿠츠크파들이 (러시아) 공산당과 결탁해서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러시아) 공산당에도 여러 지휘체계가 존재했다.
당시 독립군들이 활동하던 러시아 극동 지역의 공식 정부는 ‘원동공화국’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적백 내전 및 일본군의 개입이란 정세를 타개하기 위해 급조한 명목상의 국가다.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공산당 및 정부는 권력의 진앙지였다. 코민테른(1919년 3월, 각국 공산당들의 국제연대 조직으로 설립)의 영향력도 강했다. 러시아 공산당은 명목상으론 코민테른의 하부 조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코민테른 역시 레닌주의에 기반한 국제 조직이다. 러시아 공산당이 코민테른을 조종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러시아 공산당이든 코민테른이든 모스크바의 ‘중앙’과 현지(예컨대 러시아 극동지역)의 구성원들은 입장이 달랐다.
홍범도를 위시한 간도의 독립군 부대들과 러시아 내 한인 무장단체들은 각각 1921년 초반에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집결했다.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한인무장부대를 통합하여 단일한 독립군단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윤상원).
그러나 이 단일한 독립군단에서 어느 파가 주도권을 쥐느냐는 다른 문제였다. 초기엔 상해파가 극동공화국 정부를 견인해서 대한의용군을 창설하며 통합의 주도권을 잡았다. 신속한 독립군 통합과 항일 전쟁을 목표로 했던 홍범도 등 독립군들은 대한의용군에 가담했다. 그런데 이르쿠츠크파가 판을 뒤집는다. 마침 세계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던 모스크바 측이 이른바 ‘동양 혁명 사업’을 ‘코민테른 원동 비서부’에 독점시켰다. 그 수장은 슈미야츠키라는 사람이다. 이르쿠츠크파는 슈미야츠키와 손잡고 ‘고려혁명군정의회(총사령관으론 칼란다리시빌리라는 러시아인이 임명)’를 만들어 통합을 추진한다. ‘대한의용군 중심의 통합’ 대 ‘고려혁명군정의회 중심의 통합’이 격돌하는 구도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위계 상 원동공화국보단 코민테른 원동 비서부가 몇 배 강하다. 어느 쪽이 강력한 독립군단으로의 통합과 신속한 독립전쟁 수행에 유리할까?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들은 거취를 대한의용군에서 원동 비서부가 지지하는 고려혁명군정회의 쪽으로 옮긴다. 윤상원 교수는 이를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라고 분석한다(〈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1921년 6월28일,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은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간다. 이 부문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인 한국외대 반병률 교수에 따르면, 러시아군 1000여 명(칼란다리시빌리와 원동공화국 군대)과 카자흐 기병대 500여 명이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 작전에 나섰다. 간도 독립군 등 한인 무장 부대들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반교수에 따르면, 러시아 측이 볼 때도 “한인들이 총을 거꾸로 돌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인들은 사망자(36명, 100여 명, 익사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쳐서 400명, 600명 등의 설이 있다)를 수습할 때나 겨우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 이름을 동의 없이 넣었다”
이로부터 2개월여 뒤인 1921년 9월 초, 간도지방독립단 11단체는 이르쿠츠크파와 슈미야츠키(코민테른 원동 비서부의 수장)를 질타하는 성토문을 발표한다. 이는 임시정부가 발행하는 〈독립신문〉의 지상 논쟁과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비판으로 확산된다.
그 직후부터 1921년 11월 초까지, 이르쿠츠크파와 슈미야츠키 쪽에선 ‘(상해파) 대한의용군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여러 버전의 성명서를 잇따라 발표한다. 이 성명서들엔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안무, 이청천 등 ‘독립군 지도자 5명’의 이름이 들어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철규 의원의 ‘월척’인 ‘우리 고려 노동 군중에게’다.
이런 와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르쿠츠크파와 슈미야츠키 측은 1921년 10월, 허재욱과 이병채를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로 파견한다. 지휘부인 러시아 공산당 중앙과 코민테른 본부에 ‘상해파 진압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르쿠츠크파 성명서에 이름이 들어간 ‘지도자 5명’ 중 하나인 허재욱은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홍범도의 전우다. 이병채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참모 출신이다. 간도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시절, 홍범도와 함께 대한독립군 창건의 의의와 이유를 밝힌 ‘유고문’을 발표했다. 이 두 사람이 코민테른에 제출한 〈자유시참변에 대한 보고서〉는 이르쿠츠크파와 슈미야츠키를 옹호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귀 의회정부가 총사령관을 보내어 풍파를 야기하려 자유시에서 한국군대를 포위‧공격했다”라며 참변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문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자유시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 2022년 1월, 주미희) 이르쿠츠크파가 파견한 사람들이 도리어 이르쿠츠크파를 공격한 것이다.
같은해 12월엔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이청천 등 간도독립군 지도자 27명이 상하이파의 핵심 인물인 김동한(참변 이후 4개월 간의 구금을 당했다)에게 참변 관련 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다. 피해자인 상하이파를 자신들의 스피커로 선택한 것이다.
다음 해인 1922년 1월, 원동민족대회(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의 연석회의) 참석차 모스크바로 간 홍범도와 최진동(봉오동 전투를 함께 전개한 홍범도의 전우)은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다.
주미희의 논문에 따르면, 이 보고서는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파 간부들을 “4천년 조선의 역사 안에서 전례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살인자로 규정하면서 이들의 조속한 퇴진을 촉구했다. 보고서엔 자신들의 명의로 발표된 여러 성명서에 대한 반박도 포함되었다. 주미희가 이 보고서를 요약한 바에 따르면,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들은 “이렇게 부끄러운 성명서에 서명할 수 없었으며, 그들(이르쿠츠크파와 슈미야츠키 측)이 최후통첩을 했지만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의없이 임의로 자신들의 이름을 넣었다.”
홍범도와 최진순 등 간도 독립국 지도자 5인은 성명서에 제시된 자신들의 서명을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사실 자체를 치욕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심정이었던 홍범도가 1921년 11월 말(28~30일)에 열린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장 무서운 죄목인 ‘반혁명’ 혐의로 다수가 기소된 이 재판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3명은 징역 2년, 5명은 징역 1년, 24명은 1년간 집행유예, 17명은 방면 뒤 군대 종사.
홍범도는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나 자유시참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그가 막 제출했던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와 180도 다르게 코민테른 원동 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진압’을 옹호했을까? 주미희에 따르면, 홍범도 등은 이 보고서에 “작은 패배와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던 동지들에게 배신자로 되고 경멸을 받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토로했다.
홍범도는 이 〈보고서〉로부터 100년 뒤, 그가 일생을 바쳤던 독립된 한국의 합법 정부로부터 ‘배신자로 되고 경멸을 받’는 일을 당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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