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네요” 소멸보다 먼저, ‘소멸 감각의 소멸’이 찾아왔다
자신의 고민을 동시대와 맞닿은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참조할 만한 글이나 책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면 주저 없이 추천하는 글이 있다. 건국대 이관후 교수가 <한겨레21>에 연재하는 ‘소멸 직전의 정치’다.
가족·친구·사랑이 고민인데 정치 글을 읽으라고?
이 글을 추천하면 많은 학생이 자기가 다루려는 주제는 ‘정치’가 아니라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들은 아마도 자기가 다루는 ‘주제’를 분석하는 글을 기대했을 것이다. 가족이라면 현대 가족의 탄생에서부터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고 그것이 지금 어떤 양상으로 터져나오는지 분석한 글들 말이다.
먼저 학생들에게 왜 그 주제를 다루고 싶은지 물어보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가족이건 친구건, 혹은 어떤 공동체건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위기를 겪고 그 안에서 자기가 뼈아픈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꼈기 때문에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이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이 시대의 공통된 상처이고 고통이라면 충분히 동시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꾼으로서 작품으로 다루고 싶다는 것이다. 자기 문제를 동시대적인 일로 보려는 것은 이야기꾼으로서는 훌륭한 출발점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 문제를 동시대적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관후 교수의 글을 추천한다. ‘소멸’이라는 개념으로 바라보면 문제가 어떻게 확 달라져 보이는지 살펴볼 것을 권한다. 가족을 예로 든다면 소멸의 시각에서 가족 자체가 소멸하는지, 아니면 가족의 어떤 양상 혹은 부분이 소멸한다고 느끼는지 살펴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려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이 바로 이 시대에 무엇이 소멸하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라고 말한다.
소멸의 관점에서 자기가 창작하려는 이야기를, 혹은 자기가 연출하고 연기하려는 인물을 바라보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앞서 이 지면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조선학교 고등학생들의 ‘허세’를 다룬 연극 <장소>에서 반복돼 나오는 대사가 “우리 자이니치는 소멸하고 있다”는 말이다.(제1473호 ‘딱 한 번 ‘달라져보는 경험’이 주는 힘’ 참조) 남한도 북한도 아니라 조선‘적’을 가진 자이니치라는 존재 자체가 소멸하고 있다는 말도 되지만, 가야금을 타고 흰 저고리를 입고 일본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며 고양되는 집단적 민족의식을 자신의 자의식으로 삼던 자이니치라는 존재 양식이 소멸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 존재 양식의 소멸을 애도하며 소멸 이후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소멸에 무감각한 정치는 ‘정치의 소멸’
물론 소멸하는 모든 게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소멸해 마땅하다. 그런데도 소멸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존재하던 무엇이 소멸하는 와중에는 그 안에 연루된 사람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소멸해 마땅한지를 ‘정의’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만큼이나 이야기꾼에게 소중한 것은 그 와중에 휩쓸려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감각이다. 이 감각을 놓친다면 위대한 ‘설계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구체적인 인물을 통해 ‘드라마’를 만드는 이야기꾼은 되기 힘들다.
이 지점에서 이관후 교수의 글은 동시대의 핵심을 찌른다. 소멸이란 말만큼 명료하게 우리 시대가 경험하는 위기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이 없다. 전세계에서 유례없는 출생률 저하에 따라 한국이라는 나라의 소멸, 또한 벚꽃 지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지방이 소멸하고 있다. 더 크게 본다면 기후위기에 따라 호모사피엔스라는 인류종 전체가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이미 수많은 생명이 자연 파괴로 멸종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소멸은 말 그대로 아예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기를 겪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위기는 적당히 관리하고 극복하면 되지만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소멸은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소멸은 소멸에 관계된 사람 모두에게 절대적 의식을 요구하고, 절대적 책임을 묻는다. 외면이란 있을 수 없고 외면은 곧 절대적 ‘죄’가 된다.
이관후 교수의 글이 동시대성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소멸하는 것들의 명단을 잘 보여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소멸론의 백미는 이런 절대적 소멸에 무능하고 무감각한 한국 정치의 소멸을 다룬다는 점이다. 그는 소멸에 무감각한 정치를 ‘정치의 소멸’이라고 본다. 다른 말로 하면 소멸에 대한 감각 자체가 소멸한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즉, 우리는 소멸에 대한 감각이 소멸한 초유의 사태를 겪고 있다.
소멸에 대한 감각이 있으면 기대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누군가는 그 소멸에 대한 감각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퍼지게 한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라도 소멸에 대한 감각이 고양돼 이야기를 만들어 무리의 감각을 높이려 하고 다만 몇 명이라도 그 감각에 감응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 자체를 보존하는 일이다. 성서에서 신이 아브라함의 기도를 듣고 의인 열 명만 있다면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아브라함의 기도, 즉 이야기가 신은 설득했지만 단 열 명도 감응시키지 못했기에 소돔은 멸망했다. 감응되면서 나누고 보태며 퍼져나가기에 이야기이지, 고립돼 홀로 외치는 것이면 그건 이야기가 아니라 ‘소리’다.
과잉된 것은 이야기라기보다 ‘포르노’다
그러나 소멸에 대한 감각이 소멸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종말을 의미한다. 느끼지 못하기에 아무런 감흥이 없고, 감흥이 없으니 그 어떤 절박한 행동도 일어나지 못한다. 한국의 합계출생률은 0.78이다. 이 소식을 듣고 조앤 윌리엄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명예교수는 머리를 감싸며 “한국 완전히 망했네요”라고 말했지만, 정작 한국인 중에서 이 나라가 소멸한다고 절박하게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방이 소멸한다며 엄청난 위기라고 말하지만, 지방 소멸을 ‘내 일’처럼 느끼는 이도 그리 많지 않다. 소멸보다 더 먼저, 더 빨리 찾아온 것이 바로 소멸에 대한 감각의 소멸이다.
소멸을 감각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우리 주변을 둘러싼 미디어 장치가 소멸을 감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없어진 것, 없어지고 있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또는 없어지는 것을 지나치게 스펙터클, 즉 압도적인 구경거리로 보여주는 바람에 감각에서 소멸은 소멸하고 스펙터클만 남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멸에 대한 이미지/스펙터클이 소멸보다 우위에 선다.
소멸에 관한 이야기에서조차 스펙터클만 남고 소멸에 대한 감각이 소멸하면 이어진 것들이 연쇄로 소멸한다. 생각이 소멸하고 행동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한다. 의식 중에서도 책임 의식이 소멸한다. 소멸에 대한 책임 의식이 없으니 뻔뻔해진다. 서양에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는 수치심, 이 소멸을 초래한 것이 ‘우리’라는 것에서 오는 수치심이 사라지고 뻔뻔함만 남게 된다.
정치의 소멸은 정치‘인’들의 뻔뻔함만이 아니라 바로 소멸에 대한 책임 의식의 소멸이다. 문제에 대한 책임 의식에서 시작해 그것을 공통된 것에 공동의 행동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정치인데 그런 정치가 지금 소멸했다는 말이니까 말이다. 정치가 소멸하고 남은 자리에 남은 ‘정치’는 소멸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한갓진 소리나 하며 소멸에 대한 스펙터클에 의지하고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며 발생하는 정치적 푼돈만 챙기면서 소멸을 촉진할 뿐이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는 이 소멸의 정치에 맞서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비참한 현실을 강조하거나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걸 넘어서야 한다. 테리 이글턴이 <비극>에서 말한 것처럼 “견딜 수 없는 것을 제시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실 견딜 수 없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과잉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과잉된 것은 이야기라기보다는 ‘포르노’에 불과하다. 소멸이나 파국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포르노와 스펙터클이 만나는 최악의 결과가 나타난다.
‘소멸 동맹’을 향하여
이것이 동시대를 이야기하려는 이야기꾼이 처한 난점이다. 이야기는 사람 사이에서 회자하며 사람들을 모으기 때문에 이야기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기 위해서는 말해진 이야기가 듣는 사람에 의해 자기 경험이 보태어져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재현돼야 한다. 발터 베냐민에 따르면 이는 해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제안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즉,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이 거기에 자기 경험을 보태어 제안하게 해서 끊임없이 사람 사이에서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흩어진 사람들을 묶어낸다. 이야기는 ‘동맹’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지금 스펙터클이 되지 않으면서 ‘동맹’을 만들어내는 이 이야기를 시작이나 할 수 있는가? 반대로 스펙터클이 되고 나서도 사람들이 그것을 구경거리로 소비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보태며 새로운 것을 제안하며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가? 아니면 스펙터클 자체에 길들어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더 새롭고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찾아 소비하려고만 하는가? 제안의 연쇄가 아니라 소비의 연쇄만 더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점에서 정치인이 아니라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야말로 스펙터클이라는 운명의 파고를 넘나들며 소멸에 맞서 이야기를 자아내야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럴 때 동시대의 지배적 형식이 스펙터클에 먹히지 않고 오히려 넘어서며 동시대의 대중과 소통할 가장 적합한 방식, 즉 양식(Style)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양식을 찾을 때(혹은 찾는 과정에서) 소멸의 시대에 맞선 동시대인들의 동맹, ‘소멸 동맹’이 형성될 것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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