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가격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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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계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요즘은 반가운 신제품이 많이 나온다. 지름 34mm에서 36mm에 이르는 손목시계가 남성과 여성 시장을 동시에 노리는 젠더리스 시계로 출시되곤 한다. 시계의 크기와 손목 굵기는 큰 상관이 없다고 본다. 손목이 가는 사람이 큰 시계를 찼을 때도 나름의 멋이 있다. 손목이 두꺼운 사람이 작은 시계를 찼을 때도 마찬가지. 개인적으로는 시계가 작으면 가볍고 눈에 덜 띄어서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해밀턴 재즈마스터 퍼포머 34mm 역시 눈이 갔다.
재즈마스터 퍼포머는 해밀턴에서 2023년 출시한 재즈마스터의 신제품이다. 보통 시계 브랜드는 신제품을 만들면 다양한 변주를 한다. 이 시계도 그렇다. 일단 크로노그래프와 시간만 보여주는 ‘타임 온리’ 버전을 각각 출시한다. ‘타임 온리’ 버전은 디자인은 같으나 지름 크기가 2가지다. 38mm는 3종류, 34mm는 4가지 버전이 있다. 각 버전은 다이얼 색, 케이스 색, 스트랩/브레이슬릿 장착 등 조금씩 다르며, 가격도 그에 따라 차이가 난다. 오늘 리뷰 시계는 지름 34mm의 네이비 다이얼에 네이비 가죽 스트랩 버전. 가장 저렴하다.
시계를 보니 케이스부터 심상치 않았다. 케이스와 다이얼의 마감이 생각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케이스 마감은 각 면과 끝단 처리 모두 공을 들였다. 공들인 마감의 증표는 케이스 측면과 러그의 끝단. 이 시계는 주요 각 면과 곡면에 폴리싱과 브러싱을 섞어가며 입체감을 훌륭하게 구현했다. 이 가격대로 스위스 시계가 이런 마감을 할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케이스 두께가 조금 두꺼우나 무게중심이 낮아 거슬리지 않는다.
기능과 무브먼트에서는 오늘날의 시대를 읽을 수 있다. 무브먼트는 해밀턴 H-10. ETA 2824-2를 바탕으로 개량한 C07.611의 해밀턴 버전이다. 기능은 시, 분, 초뿐. 요즘은 데이트 표시 창도 없는 경우가 많다. 시대의 수요를 반영했다고 봐야 한다. 현대사회의 기계식 시계 무브먼트 기술은 ‘이 시계를 매일 차지 않아도 좋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오늘날엔 날짜 창이 있는 게 더 불편하다. 8일에 시계를 찼다가 9일부터 12일까지는 스마트워치를 찼고 13일에 기계식 시계를 차려니 날짜가 9일쯤 멈춰 있다면 사용자가 귀찮아질 뿐이다. 점점 길어지는 파워 리저브도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H-10은 파워 리저브도 80시간으로 길다.
이 시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가격이다. 이 시계는 다이얼에 선레이 가공을 하고(저가 선레이 가공처럼 저렴한 티가 나지도 않는다), 시침과 분침에 각을 세우고, 인덱스도 프린트가 아닌 바 인덱스를 달고, 베젤 가장자리에 5분 단위 분 표시를 음각으로 새기고, 100m 방수가 되도록 나사로 크라운을 잠그는 스크루 크라운 방식을 채택했는데, 권장 소비자가격이 1백52만원이다. 인터넷에 이 제품의 최저가를 검색하면 더 싼 것도 있다. 충격적이다. 이 정도의 디테일이 없어도 몇 배 더 비싼 시계를 만들어 파는 브랜드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계를 차고 다니는 내내 가장 많이 한 생각은 감탄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이 소비자가격에 이 정도의 스펙이 가능하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다른 브랜드는 폭리를 취하나? 아니면 사양이 같음에도 낮은 단가에 제조하는 것 역시 기업의 역량이니 이것이 해밀턴과 스와치그룹의 재주인가? 이 사양의 시계가 이 가격이라면 기계식 손목시계의 적정 가격은 얼마인가? 이른바 ‘합리적인 가격대’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합리적인 가격은 얼마인가? 이 시계의 상품성은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 만큼 뛰어났다.
내 입장에서는 이 시계를 나무랄 구석이 없다. 장기 사용을 하지 않아 오래 썼을 때 무브먼트 정확도를 담보할 수 없을 뿐, 이 시계를 추천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 쉽지 않다. 굳이 불편한 부분을 찾자면 돌덩어리 같은 가죽 스트랩. 이렇게 딱딱한 가죽 스트랩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구매한다면 이 부분은 문제가 아니다. 저렴한 애프터 마켓 가죽 스트랩이 많으니까. 이 시계는 첫 고가 기계식 시계를 사는 사람에게는 경쟁 모델을 찾기 어려울 만큼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고급 시계의 디테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시계가 될 것이다.
이런 게 끌린다면
‣ 요즘 유행하는 푸른색 다이얼
‣ 라이언 고슬링도 즐겨 찬다는 지름이 작은 손목시계의 매력
‣ 스위스 시계 중에서는 비교군을 찾기 힘들 만큼 압도적인 가격 대비 디테일
이런 게 망설여진다면
‣ ‘그래도 해밀턴…?’ 싶은 브랜드의 인지도와 세속 급수
‣ 어떻게 만들면 이럴 수 있나 싶을 만큼 딱딱한 가죽 스트랩
‣ 개인 기호에 따라 산만해 보일 수 있는 베젤의 음각 인덱스
해밀턴 재즈마스터 퍼포머 오토
Editor : 박찬용 | Photography : 신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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