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 한인 과학자] 진성호 재영과협회장 “국제협력은 빅픽처… 인적교류로 신뢰부터 쌓아야”
영국은 산업혁명의 출발점인 동시에 기초과학 연구의 역사도 깊다. 산업 기술과 기초과학이 조화를 이루며 발전한 대표적인 국가로 손꼽힌다. 최근에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새로운 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향하는 곳도 영국 케임브리지대였다.
윤석열 정부 들어 과학기술 분야의 해외 협력을 강조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영국과의 협력도 강화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6월 영국 런던에서 영국 과학혁신기술부와 공동으로 제15차 한-영국 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열고 우주, 핵융합, 합성생물학, 양자과학기술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원래는 국장급으로 열던 위원회를 올해부터 차관급으로 격상했다.
한국도 영국처럼 산업 기술과 기초과학이 함께 발전할 수 있을까. 조선비즈는 지난 8월 30일 진성호 재영한인과학기술자협회(재영과협) 회장과 줌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국 링컨대 공대 교수인 진 회장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600여명의 한인 과학자들이 소속된 재영과협을 이끌고 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과학기술 분야의 해외 협력이 화두가 됐다. 영국 과학기술계와 협력을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산이 늘어난다고 해서 갑자기 협력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 최근에 한국 연구기관이 영국과의 접촉을 늘리고 행사를 여럿 만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상호 간에 이해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쉽지 않다. 결국 연구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 간의 신뢰부터 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외 협력 프로젝트가 일회성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영국은 한국과 문화가 많이 다르다. 일을 진행하는 프로세스도 다르다. 영국은 차근차근 느리게 진행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잘 알아야 한다.”
-사람 간의 신뢰를 쌓는 건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국제협력이나 공동 연구는 굉장한 빅픽처(Bic Picture)다. 조직과 조직, 단체와 단체, 국가와 국가가 어느 날 갑자기 이어질 수는 없다. 인적 교류를 꾸준히 하면서 서로의 연구 문화를 이해하고, 히스토리가 형성된 이후에야 조직적인 교류가 가능하다.
영국에는 로얄 소사이어티(The Royal Society·영국왕립학회)라는 과학자들의 모임이 있다. 로얄 소사이어티가 여러 국가와 협약을 맺고 연구자 간의 교류를 진행하고 있는데, 한국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이런 네트워킹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단계적으로 늘려 나가야 한다.”
-영국 과학기술계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궁금하다. 한국 과학기술에 대한 영국 내부의 평가는 어떤가.
“한국의 산업기술에 대한 평가가 높다. 정부가 과학기술 분야에 꾸준히 투자를 하고, 인력 양성에도 힘을 쏟았기 때문에 산업 기술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본다. 기초과학이나 순수과학의 수준도 상당하다는 평가가 많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이미 선진국 수준이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영국과의 교류나 협력을 늘리고 싶다면 한국의 발전한 산업 기술을 내세우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영국에서는 한국의 기업들이나 산업 기술에 관심이 굉장히 크다. 영국에서 관심 있는 산업기술을 중심으로 협력을 시작해서 한국에 부족한 기초과학 분야를 얻어내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은 최근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33년 만에 삭감됐다. R&D 투자의 비효율을 제거하고 수월성 위주로의 개혁이 화두가 됐다. 영국은 국가 R&D 투자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궁금하다.
“영국에는 한국의 정부출연연구기관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연구소는 민간 연구소거나 대학 부설 연구소가 대부분이다. 중장기적인 R&D는 영국 연구혁신기구(UKRI) 산하 9개 위원회가 세운다. UKRI는 직접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니라 정책을 수립하고 과제를 나눠주는 역할만 한다.
소규모 R&D 과제는 펠로우십 프로젝트의 형태로 진행한다. 주로 신진연구자를 지원하는 차원이다. 대형 프로젝트는 런던의 유명 대학이 가져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규모 R&D 과제는 신진연구자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한국 과학계에서는 연구자의 자율성을 늘려달라는 요구가 많다.
“영국도 국가 R&D 과제에서는 비용 집행 절차가 까다롭다. 연구장비 하나를 사더라도 여러 회사에서 견적을 받아서 경쟁을 해야 한다. 예산 집행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심사가 이뤄지는 게 보통이다. 대신 평가는 굉장히 간단하다. 소규모든 대형 프로젝트든 연구 결과에 대한 평가는 관대한 분위기가 있다. 과제 중간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같은 경우도 간략하게 작성해도 무방하다. 한국은 연구자가 보고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쓴다고 알고 있는데 영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해외 연구자를 한국에 데려오려면 어떤 부분을 신경써야 할까.
“영국도 연구인력 수급에 문제가 많다. 박사나 박사후연구원의 상당수가 영국인이 아니라 중국이나 인도, 중동에서 오고 있다. 영국도 해외에서 우수한 연구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한국과 다른 점이라면 영국은 언어 장벽이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연구자가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한국에게 이점이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연구자에 대한 보상이나 페이는 별 차이가 없다. 문화나 언어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중요하다.
또 하나 문제는 한국의 경우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영국만 해도 지방자치가 잘 이뤄져 있고, 대부분의 지역이 기업과 대학이 잘 갖춰져 있어서 자생할 수 있는 여건이 있다. 하지만 한국은 지방으로 내려가면 산학 연계도 쉽지 않고 외국인 입장에서 정착이 쉽지 않다. 이런 문제도 해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국의 R&D 개혁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외에서 활동하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한국의 과학기술계에 조언을 한다면.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인 과학자들을 향한 시선을 고쳤으면 좋겠다. 해외 한인 과학자를 인재 유출의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국제 협력이 강조되는 시대에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인 과학자를 인재 유출로 보는 건 모순이다. 인재 유출이 아니라 인재 수출로 보는 게 맞다고 본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인 과학자가 한국과 외국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결국에는 과학기술 정책에서 중요한 건 장비나 시설,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은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인재를 양성하고 발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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