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그 사연] 전형적인 남성 가수의 틀 깨버린 9월의 남자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폭염이 끝나고 바람이 서서히 불어 가을을 실감한다.
김범룡은 1985년 '바람! 바람! 바람!'을 불러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지만 사실 당시 가요계가 원하는 스타의 자질과는 거리가 먼 가수였다.
그는 '바람! 바람! 바람!'으로 9월 KBS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골든컵을 수상했다.
1987년엔 '카페와 연인'이란 곡을 발표했는데, 그해 9월 다시 한번 골든컵을 들어 올렸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폭염이 끝나고 바람이 서서히 불어 가을을 실감한다. 이럴 때 떠오르는 가수 가운데 한명이 김범룡이다.
김범룡은 1985년 ‘바람! 바람! 바람!’을 불러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지만 사실 당시 가요계가 원하는 스타의 자질과는 거리가 먼 가수였다. 우선 그는 서구적인 외모가 아니었다. 코가 높고 쌍꺼풀이 진해야 미남·미녀라 불리던 시절에 그는 둥그스름한, 전형적인 한국형 얼굴이었다.
음색도 마찬가지. 1980년대까지 남성 가수라면 프랭크 시나트라처럼 저음으로 노래하거나 조용필류의 온몸으로 인생을 노래하는 이들이 인기를 얻었다. 김범룡 목소리는 시대가 원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특히 그는 가수로서 핸디캡이 있었다. 혀가 짧은 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가 기획사 오디션을 봤을 때, 회사 대표는 그의 독특함을 오히려 경쟁력으로 봤다.
사실 김범룡은 화가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 고교 시절 노래를 100곡 정도 만들어뒀을 만큼 음악과 친숙했는데, 미술대회에서도 입상하며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미술로 진로를 정하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합격했다. 하지만 가난이 발목을 잡았다. 장학생으로 충북대학교 서양화과에 적을 두고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음악에 미련을 거두지 못해 1981년 KBS 연포가요제에 듀엣 ‘빈수레’로 출전했고 우수상을 받았다. 모친의 빚도 있었고 미술로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여겨, 결국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1985년 ‘바람! 바람! 바람!’으로 데뷔했다.
“내 님은 바람이련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오늘도 잠 못 이루고/ 어둠 속에 잠기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날 울려놓고 가는 바람.”
김범룡을 9월의 남자로 언급할 만한 특별한 기록이 있다. 그는 ‘바람! 바람! 바람!’으로 9월 KBS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골든컵을 수상했다. 1987년엔 ‘카페와 연인’이란 곡을 발표했는데, 그해 9월 다시 한번 골든컵을 들어 올렸다. 9월에 두곡이나 가요차트 1위를 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현재 바람을 불륜이나 풍비박산처럼 좋지 않은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바람 풍(風)’ 자를 풀어 나눠보면 ‘새 나는 모양 수(几)’와 ‘벌레 충(蟲)’이다. ‘수’ 자는 원래 봉황새가 나는 모양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바람이 봉황새의 날갯짓으로 시작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올해도 한국 사회는 바람 잘 날이 없다. 봉황새 바람 같은 멋진 바람이 불기를 기대해본다.
박성건 대중음악평론가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