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이미지의 시대에 자연·농촌·이웃 느릿느릿 화폭에… 임동식이 건네는 위로
부드럽지만 섬세한 유화… 유머러스한 특징
벌거벗은 사람이 숲 한가운데 서서 뭔가를 들고 있다. 초록색 이끼다. 주변을 감싼 풍경도 예사롭지 않다. 풀, 잡초, 꽃, 거목 등이 원시림을 떠올리게 한다. 이끼를 닮은 색이다. 거목의 누르스름한 가지는 남자의 피부색을 닮았다. 자연과 사람은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끼를 들어 올린 모습에서는 자연을 향한 작가의 경의가 읽힌다.
1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개막한 자연미술가 임동식(78)의 개인전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 임동식’에 전시된 회화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이다. 이번 전시에는 임 작가가 자연과 농촌, 이웃 등을 그린 회화 40여 점, 드로잉 100여 점이 나왔다.
강렬한 이미지가 판치는 시대에 ‘촌스러운’ 그림을 느리고 정성스럽게 그려 주는 울림이 있다.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은 원래 1991년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전’에서 임 작가가 벌였던 야외 퍼포먼스를 회화로 옮긴 것이다. 이후 이를 유화로 화폭에 담으면서 옷을 입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나체로 바꿨다. 자연과 인간의 동화를 강조한 셈이다.
왜 이끼일까. 이끼는 강에서 뭍으로 올라온 최초의 식물이라 할 수 있다. 태고부터 존재했을 법한 자연물이다. 장난감이 마땅치 않았을 선사시대에 이를 갖고 노는 어린이를 떠올리게 한다. 원초적 자연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임 작가의 작업 속도는 느리고, 화풍은 부드럽다. 작가는 수년∼수십 년에 걸쳐 한 그림을 그리고 또 고쳐 그리고는 한다.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도 1993년 처음 그린 뒤, 2004년과 2020년 본인을 그린 양 옆에 숲 그림을 더해 완성했다. 공들인 만큼, 부드러움 속에 섬세한 표현이 살아 있기도 하다.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은 수년간 넓적붓으로 유화 물감을 계속 덧칠했다. 이름 모를 풀과 꽃, 나뭇잎과 가지의 모습도 세세히 그렸다.
그의 그림은 해학도 담고 있다. '이끼를 들어 올리는 사람'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우스꽝스러운 광경이기도 하다. 작가가 2007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비단장사 왕서방’ 시리즈 가운데 한 작품(점원시절2)에는 왕서방이 점포 마룻바닥에서 낮잠을 자는 듯한 모습이 표현돼 있다. 이 그림에는 마룻바닥에 비친 비단이 무지갯빛으로 절묘하게 묘사되는데. 인간적이지만 치밀한 그의 예술세계를 잘 나타낸다. 임 작가는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6년이 걸렸다.
이같이 주변 환경이나 일상을 소재로 삼는 것도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한 요인이다. ‘산토끼 되어 양구의 별빛 아래 서다’는 작가가 밤하늘의 쏟아지는 듯한 별빛 아래서 토끼 귀 모양을 만들듯이 나뭇잎을 양쪽 귀에 대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키우던 애완용 토끼가 죽자, 여행을 떠나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워했던 작가의 자화상을 담은 것이다. ‘비단장사 왕서방’ 속 왕서방도 작가의 고향인 충남 공주시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 주민을 모델로 한 것이다.
1974년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임 작가는 1981년 국내 최초의 자연미술운동그룹인 '야투'(野投)를 설립하는 등 자연미술을 지속했다. 1990년 독일 함부르크미대 유학 생활을 마치고 공주시 신풍면 원골마을로 낙향한 그는 자주 가는 식당 주인이자 동갑내기 친구 우평남씨를 우연히 만나 산과 들로 다니며 함께 풍경화를 그렸다. 임 작가를 만난 뒤 처음 붓을 잡은 우씨는 지난 2019년 임 작가와 함께 미술전을 열기도 했다. 임 작가는 이번 전시에도 우씨와 자신이 함께한 사계절의 모습을 담은 ‘자연예술가와 화가’란 그림을 내걸었다.
자극적인 이미지는 차고 넘치지만 정신의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 시대다. 이런 때 임 작가의 그림은 보는 이에게 정서적 위로가 된다. 김선희 가나아트 고문은 “서양미술에서 사람을 자극시키는 극단적 기류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고, 세상은 점점 발전하는데 원인 모를 불안은 커진다”며 “임 작가의 그림은 이와 반대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사람을 안정시키고 고요하게 해 준다”고 평했다. 전시는 10월 1일까지.
김청환 기자 ch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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