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쪽방촌의 '온기창고' 오픈런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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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온기창고'라는 가게가 문을 열었다.
나는 다른 쪽방촌에서 '희망의 인문학' 수업을 하던 중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일어 이 낯선 가게를 찾았다.
그러나 이제 쪽방촌 주민들은 온기창고의 '귀한 손님들'이 되어, 원하는 것을 선점하기 위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오픈런'을 한다.
아침 10시쯤 '온기창고' 앞은 여느 편의점이나 마트보다 분주하고 활력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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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온기창고'라는 가게가 문을 열었다. 나는 다른 쪽방촌에서 '희망의 인문학' 수업을 하던 중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일어 이 낯선 가게를 찾았다. 동자동 쪽방촌에 세워진 온기창고의 구매자(소비자)는 쪽방촌 주민 800여 명 정도로 이들에게 월 10만 점의 적립금을 준다. 이 가게는 월, 수, 금요일에 문을 열며, 일주일에 최대 2만5000점을 사용할 수 있다. 이제는 행인들의 눈총을 받는 길거리나 지린내 나는 담벼락 아래에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
세상은 신상품과 명품, 그리고 유명스타들을 향해 '오픈런'이나 '밤샘 줄서기' 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온갖 SNS에 자랑한다. 그러나 소외계층에게 주어지는 후원품 배급(?)의 줄서기는 사랑나눔보다 수치의 행렬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쪽방촌 주민들은 온기창고의 '귀한 손님들'이 되어, 원하는 것을 선점하기 위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오픈런'을 한다.
아침 10시쯤 '온기창고' 앞은 여느 편의점이나 마트보다 분주하고 활력이 넘쳤다. 각처에서 보내온 후원 물품을 사회복지사와 공공일자리 사업 참여자인 쪽방주민들이 정리하며 개점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원봉사자인 장정기(남·50)씨는 "근처 공원에서 길게 줄지어 서서 물품을 받던 분들이 지금은 장바구니를 들고 물건을 담는 모습이 참 신기해요"라며 웃었다. 한 여성 주민은 "우리는 지금 너무 감사하고, 이런 가게가 절대 문 닫지 말기를 바랄 뿐이에요"라며, 장바구니에 휴지와 조미김을 담았다. 다른 주민은 자기의 적립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서 구매력 없는(?) 직원들에게 맛보라고 나눠 주며 말했다. "선생님들 너무 고생이 많아요. 전에는 대장처럼 보였는데...하하하..."
쪽방촌 주민들이 소소한 물품들이지만 돈 걱정하지 않고 ‘내돈내산’을 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온기창고’ 직원들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추장, 된장, 국물맛내기 조미료 등이 1등 인기품목이라는 것. 폼나는 각휴지보다 실용적인 두루마리 휴지를 더 좋아한다는 것. "많이 사면 적립해주는 제도는 없어요?"라는 문의에 가게 안에 폭소가 터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렇다! 즐겁고, 주눅 들지 않게 받는 사람은 이웃과도 즐거움과 존중을 공유할 수 있다.
그동안 사회는 선착순이나 줄서기를 통한 일률적인 후원물품 배부방식을 당연히 여겼다. 쪽방촌 주민들의 자존감과 자립기초를 세워나가는 데 필요한 동기를 부여하는 일에 대해서는 잊은 듯했다. 그래서 ‘주는 자와 받는 자’라는 분리와 차별, 편견의 담을 쌓게 된 것은 아닌가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온기창고’는 담을 허물고, 그 자리에 ‘자존의 꽃과 자립의 나무’를 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시작하는 과정에서 미숙함이나 실수 등의 시행착오는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부족한 점은 보완하고, 서툰 부분은 연구해가면서 쪽방주민을 ‘습관화된 수혜자’가 아닌 사회 구성원의 역할 중 하나인 ‘능동적이고 즐거운 구매자’로 인식을 개선하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더 나아가 함께 나누고 서로를 보듬는 이웃이 되기를 꿈꿔본다.
온기창고에서 나오려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가게 안은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로 붐볐으며, 계산대는 대형마트에서나 볼 수 있는 줄서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두운 쪽방에서 나와 장보기의 즐거움, 이웃과의 만남이 생생하게 이루어지는 온기창고였다. 이곳이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날, 주민들은 이 갑작스러운 비를 맞으며 우왕좌왕했을 것이고, 곧 다가오는 겨울에는 추위 속에서 콜록거리며 배급의 시간을 견뎌내야 할 텐데!
누군가 진정한 마음으로 이웃을 위한 일을 할 때에 날카로운 시선 대신 너그러운 지혜를 나누어주고, 지갑도 열어주는 사람들이 더 많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정한지!
노경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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