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저출생, 허경영씨한테 물어봐야 하나
당시 황당했지만 지금은 보편화
인간 욕망·불안 잘 건드려 눈길
저출생 대책, 백약이 무효인데…
대선 ‘단골 후보’ 허경영씨가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너무 많다”라고 했을 때 딴 나라 얘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난 정부 3년간 민간단체에 지원한 국고 보조금 중 314억원(총 1865건)이 횡령·유용 등으로 도둑질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묻힌 민족 영웅을 발굴한다고 해놓고 현 정부 퇴진 운동을 벌인 단체도 있었다.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사업의 재원으로 쓰인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선 8440억원(총 7626건)의 위반·부당 집행 사례가 밝혀졌다. 내국세의 20.79%를 무조건 시도 교육청에 나눠주는 지방교육교부금의 경우 1년에 14조원꼴로 불필요하게 지출됐다는 감사원 지적도 나왔다. 대장동 비리로 돈방석에 오른 일당 중 한 명은 전 언론노조위원장과 허위 인터뷰를 하고 1억6000여만원을 송금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전 위원장이 쓴 책 3권의 값으로 줬다고 한다. 1권당 5000만원이 넘는다. “도둑이...”라는 허씨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허씨는 1997년 대선 공약으로 ‘토요 휴무제’를 주장했는데 노무현 정부에서 현실화했다. 당시는 북한이 첫 핵실험을 하기 9년 전인데도 ‘핵 주권 회복’을 공약하기도 했다. 김정은이 ‘남한 핵 공격’을 공공연히 협박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그의 26년 전 주장은 ‘선견지명’ 아니냐는 착각마저 든다. ‘기본 소득’ ‘수능 폐지’ ‘여성부 폐지’ ‘국회의원 축소’ 등도 그의 공약집에 있던 내용이다.
허씨는 2007년 대선에서 출산 수당 3000만원, 결혼 수당 1억원을 공약했다. 2007년은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1.26명으로 전년보다 0.13명 증가한 해였다. ‘황금 돼지의 해’라며 2006년보다 4만5000여 명 많은 49만7000여 명을 낳았다. 이때만 해도 저출생이 ‘국가 소멸’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도 허씨는 인구 구조가 붕괴한다며 결혼과 출산으로 고민하는 여성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이들이 ‘황당’ ‘사기’라며 웃어넘겼다. 그런데 지금 출산 장려금은 필수 복지가 됐다.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아기를 낳으면 앞다퉈 현금을 준다. 다둥이를 출산하면 수천만원을 지원하는 지자체도 있다. 재작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 경선에 나선 후보는 “서울에서 독립해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으면 총 1억1700만원의 보조금 혜택을 주겠다”고 했다. “허경영 같다”는 비난이 나왔지만, 후보는 “서울시 예산의 100분의 1 정도 쓰는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허씨의 2007년 공약 때처럼 ‘황당하다’는 반응은 적었다. 그만큼 저출생 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올 2분기(4~6월) 합계출산율이 0.7명으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출생아 수는 연말로 갈수록 줄어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대로라면 올해 출산율이 0.6명대라는 듣도 보도 못한 숫자를 찍을 수도 있다. 작년 출산율은 0.7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국 중 최하위였다. 우리 인구는 44개월째 자연 감소 중이다. 미국 CNN은 작년 말 “한국은 2000억 달러(264조원)를 투입했지만 출산율을 높이지 못했다.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종족 보존은 인간의 본능이다. 이보다 앞선 것이 자기 생존의 본능이다. 젊은 세대는 ‘내가 죽을 판인데 아이를 어떻게 낳아 기르느냐’고 한다. 지금 정부·전문가의 저출생 대책은 2007년 허경영씨의 공약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허씨 공약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인간의 감춰진 욕망과 불안을 잘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실현 가능성은 그다음이다. 백약이 무효인 저출생 문제 해법을 허씨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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