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월북 얼룩진 암흑기 르네상스서 ‘경성 천재’들 건져 올린 괴짜 학예사

김윤덕 선임기자 2023. 9. 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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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이 만난 사람] ‘살롱 드 경성’ 책으로 낸 김인혜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을 그만둔 김인혜는 “당분간 전시가 아니라 책을 쓸 것”이라고 했다. ‘살롱 드 경성’은 “원작에 가깝게 그림이 인쇄돼 기쁘다”고 했다. /오종찬 기자

미술사가 김인혜는 덕수궁을 우리 근대미술의 보고(寶庫)로 만든 주역이다. 서양 블록버스터 전시가 홍수를 이룰 때 이중섭, 유영국, 윤형근 전시를 비롯, 경성시대 천재들의 삶과 예술을 파노라마로 펼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전을 기획, 대흥행시켰다. 2030세대엔 ‘RM이 먼저 알아본 큐레이터’로 유명하지만, 본지 독자에겐 ‘살롱 드 경성’의 필자로 사랑받는 그를 덕수궁에서 만났다. 그는 20년 몸 담은 국립현대미술관을 떠나 최근 자유인이 됐다.

◇모른 척 외면했던 근대

-2021년 3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한 ‘살롱 드 경성’이 책으로 나왔다.

“연재 초반부터 여러 곳에서 출간 제의가 들어왔다. 이렇게 오래 쓰게 될 줄 몰라서 다 거절했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독자들 요청이 많아져 용기를 냈다. 아주 적극적인 분은 대뜸 전화하셔서 신문 스크랩을 매번 안 해도 되게 책으로 내달라고 독촉하시더라. 그래서 펴냈는데 안 사시면 곤란하다, 하하!”

-왜 경성인가?

“한 작가가 이런 비유를 했다. 과거에 우리가 한복을 입다가 지금은 청바지를 입는데 그 사이엔 뭘 입었지? 전통미술, 현대미술은 알겠는데 그 사이엔 뭐가 있었지? 그래서 제가 기획한 근대 전시를 볼 때마다 놀랐다고 했다. 책도 많이 읽고 나름 공부도 많이 한 자신이 경성시대를 모르고, 모른다는 인식조차 못 했다는 사실에.”

-한국 미술사에서 근대는 왜 공백으로 남아 있을까.

“모른 척 덮어두었다고 할까. 굉장히 어두운 시대였고,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이 그때를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이 시대는 덮고 빨리 세계화에 발맞춰 현대로 가야 한다는 강박이 근대를 돌아볼 여유를 빼앗은 것이다.”

-경성시대를 암흑기 르네상스라고 했더라.

“이상과 김환기의 아내였던 김향안의 표현대로 그 시대는 ‘식민지라는 치명적 조건 하에서 아무도 절대로 행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시대만큼 또 역동적인 시대가 없었다. ‘우리가 처음 하는 생각인가?’ 하고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930~40년대로 간다. 우리 사고의 원류 같은 것들이 그때 다 나온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그 짧은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에너지가 분출한다.”

미술사가 김인혜가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에 연재하고 있는 '살롱 드 경성'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다. /해냄출판사 제공

-경성시대와 유럽의 바우하우스 시대가 겹치는 건 우연일까.

“1차 대전 직후 유럽에선 바우하우스뿐 아니라 다다, 초현실주의, 미래파, 추상 등 온갖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분출하고 충돌했다. 경성의 예술가들도 이런 사조를 알고 있었다. 이상의 북디자인에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 나움 가보의 아이디어가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파리로 치면 1920년대 에콜 드 파리다. 모딜리아니, 샤갈 등 여러 국적의 작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었다. 문화적으로 가장 액티브했던 그 시기가 우리의 경성시대였다.”

-그 시절 경성엔 천재들이 넘쳐나더라.

“시인이자 화가 이상이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다. 우리 문화사에서 어느 때보다 아방가르드 했던 그 시대는 미술이 문학이 되고 문학이 음악이 되고 영화가 되는 융합의 시대였다. 네트워크도 엄청났다. 이상은 곱추 화가 구본웅과 어울리고, 구본웅의 이복 이모는 김향안이다. 김향안의 두 번째 남편인 김환기가 가장 존경했던 선배는 화가이자 수필가인 김용준이고, 김용준 절친 이태준은 다시 이상으로 연결된다. 이상이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발표했을 때 많은 이들이 맹비난했지만 이태준이 사표를 품고 다니면서 이걸 지켰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월북하거나 사회주의를 동경했다.

“그 시절 예술가들은 남에 살았으면 북으로, 북에 살았으면 남으로 갔을 것이다. 남은 극우로, 북은 극좌로 치닫고 있어서 ‘저기는 다를까?’ 하는 기대감으로. 이를테면 박수근, 박고석은 북의 극단적 체제를 피해 남으로 온 사람들이다. 자발적으로 북에 간 사람은 많지 않다. 어디까지가 ‘자발’인지도 모르겠다. 전쟁 중 부역에 걸려 생존을 위해 북으로 갔지만, 분단이 고착될 줄 몰랐던 이도 많았다. 사회 전체가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인데 그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게 맞을까.”

-월북만큼 친일도 족쇄가 됐다.

“막상 해방 공간에 살았던 사람들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는 측면이 있었다. 나는 요즘 최남선에 빠져서 그의 책을 모조리 읽고 있는데, 그가 1946년에 낸 책들은 완전 베스트셀러였다. 친일 행적으로 최남선이 지탄의 대상이었다면 해방 직후 어떻게 베스트셀러가 됐겠나. 나는 친일과 월북을 후대들이 진영 싸움을 하면서 이용하는 게 더 크다고 본다. 친일이라 버리고 월북이라 버리면 우리는 그 시대 놀라운 보물들을 건져올릴 수 없다. 놀랍다, 경이롭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 근대미술을 다 버리고 갈 것인가?”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그린 부부, ‘산보’, 1977-90, 환기미술관 소장.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세금이 아깝지 않은 전시”

-김환기 편에선 아내 김향안 얘기가 더 많이 나온다.

“일부러 그랬다(웃음). 유영국 편에서도 그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아내 김기순이 더 부각된다. 경성시대엔 여성 작가가 많지 않았다. 나혜석 이성자 박래현 천경자 정도다. 그러면 그 시대 많은 여성들은 뭘 했나. 실직자나 다름없는 남편의 예술을 위해 절대적 희생을 했다. 김향안이 없다면 김환기도 없었다.”

-박태원의 외손자 봉준호, 구본웅의 외손녀 강수진 등 후세들 이야기도 화제였다.

“한 작가를 파고들다 보면 자연히 후손을 알게 된다. 지난해 LA 라크마에서 열린 한국근대미술전에서 나혜석의 손자 스탠 킴을 만났다. 아버지(김진)는 아들이 미술하는 걸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미술치료사가 됐더라. 그는 ‘할머니가 자랑스럽고 슬프다’고 했다.”

-변시지, 변월룡 등 대중엔 낯선 작가들도 소개했다.

“아무래도 작가 선정엔 내 주관적인 평가가 들어간다. 유명한 작가라도 내가 관심이 없으면 다루지 않았다. 독창성을 가장 중시했다. 그 작가만의 색깔이 있는가.”

-근대미술을 파고든 건 언제부터였나.

“독일 낭만주의로 석사를, 루쉰의 목판화 운동으로 박사 논문을 끝내자 이제 한국 미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근대 연구가 늦어진 건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한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 작품을 했는지 알려면 그의 일기, 노트, 사진 등 온갖 자료가 뒷받침돼야 한다. 외국 작가들의 스토리가 풍부한 건 그 때문이다.”

-그래서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미술연구센터를 개설했나?

“당시 정형민 관장님이 내게 그 업무를 맡겼다. 예산을 따러 기재부에만 11번을 찾아갔다. 유족에게 기증도 받고, 기증 받지 못한 것들은 디지털로 스캔해서 기록했다. 현재 45만점이 모였고, 그 첫 수혜자가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다.”

-조선일보와 공동기획해 35만 관객이 든 전시 말인가?

“그렇다. 당시 빌릴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아 아카이브를 적극 활용해 스토리를 구성하고 16m짜리 영상 벽면도 만들었다.”

-자료를 찾는 일이 즐거운가?

“일본의 빈 집에서 먼지에 쌓인 장욱진 그림을 찾아내면 누구나 탄성을 지르기 마련이다. 근대 자료들은 아직도 너무 많이 흩어져 있다. 정작 유족들은 그 가치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발견되지 않고 사장되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근대 역사가 다 그렇지 않나.”

-유족들은 쉽게 협조해주나?

“일단 대화를 해야 한다. 대체로 연세가 많은 분들이라 4시간 정도 지나야 진짜가 나온다(웃음). 고구마 줄기 캐듯 작품을 찾는다고 하는데, 처음엔 이걸 찾으러 갔다가 전혀 다른 작품을 찾기도 한다.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러 나무’도 그렇게 발견했다.”

-발굴한 자료를 전시로, 글로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더라.

“큐레이터의 가장 럭키하면서도 중요한 역할은 ‘공유’에 있다. 좋은 작품을 보면 공공미술관 큐레이터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전시를 하고, 영구히 소장하는 일을 함께 한다. 관객들로부터 듣는 가장 기쁜 말이 뭔지 아나? ‘지금까지 낸 세금이 아깝지 않다’는 평가다(웃음).”

RM의 첫 솔로앨범 표지를 장식한 윤형근 그림 ‘청색’(70×67.9㎝)이 벽에 걸려 있다. 소속사 측은 “음악과 미술을 잇는 예술 협업을 이뤄냈다”고 소개했다. RM은 윤형근 작품의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빅히트뮤직

◇컬렉터 RM에게 배운다

-책에 방탄소년단 RM 이야기가 나온다.

“RM이 덕수궁 전시는 빠짐없이 보러 온다. 2019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안목에 놀랐다. 이쾌대의 ‘군상’을 보고 ‘미켈란젤로 같다’고도 하고, 최재덕의 ‘원두막’을 보고 나만큼이나 뒤로 넘어가서(웃음). 이제 본격적인 컬렉터가 된 RM에게 내가 더 배워야 할 판이다. 컬렉터는 작품을 늘 곁에 두고 보는 이들이라 연구자가 못 보는 걸 본다.”

-RM 효과겠지만, 2030세대가 근대미술을 사랑하는 이유는 뭘까.

“식민지 근대는 열정 페이처럼 열정 하나로 뭔가를 일구며 살았던 예술가의 시대였다. 그게 지금하고 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가장 유행했던 단어가 룸펜이다. 본 것도, 배운 것도 많은데 직업이 없다. 예술가들이 거의 실직자였다. 그런 사람들이 뭔가를 해서 남겨놨다는 것에 열광하는 게 아닐까. 2030세대가 해외 경험이 많아서 그런가 안목도 높다.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러나무’를 보면서 ‘반 고흐의 아몬드 트리 같지 않아?’라고 한다. 일본 미술관엔 전부 연세 많은 관람객인데 한국엔 젊은이들이 바글바글하다. 미래가 있는 것 같다.”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러나무'. 김인혜 학예관이 기획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에 나와 RM을 비롯해 수많은 관람객의 사랑을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예술은 본능이고 생존

-어쩌다 고고미술사를 전공했나.

“수학, 화학을 좋아했는데 왠지 이과로 가면 인생이 재미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웃음). 그렇다고 선생님들이 가라는 법대는 죽어도 가기 싫었다. 재미없을 것 같은 과를 빼고 빼다가 미학, 동양사학, 고고미술사로 압축됐는데 제일 모르는 게 고고미술사라 선택했다.”

-후회는 없었나.

“현장에서 실증해가며 공부하는 게 좋았다. 노가다 소릴 들을망정, 하하!”

-부모님은 미술과 관련 있는 분들인가?

“전혀 아니다. 부모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과 대가족이었다. 어떨 때는 집에 할머니가 네 분 계셨고, 집은 늘 손님들로 늘 북적였다. 그 속에서 나는 공부란 책을 읽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경험을 배우는 것이란 걸 알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중 첫 박사학위 소유자라더라.

“그런가? 애 키우고 직장 다니고 박사학위 따느라 머리가 세 쪽 나는 경험을 한 건 맞는다.”

-전시로 상도 많이 받았더라. 김인혜만의 원칙이 있을까.

“내 주장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는다. 관객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여지를 두려고 한다. 특히 국립미술관 관객층은 너무도 다양해 5분 만에 보고 가는 사람부터 하루 종일 보는 사람까지 배려해야 한다. 전시를 가장 빨리 보는 그룹은 중학생 남자 단체 관람인데, 그들조차도 눈에 쏙 들어올 만한 작품을 좋은 위치에 배치하려고 노력한다.”

-직업병은 없나?

“액자가 비뚤어지게 걸린 걸 못 참는다(웃음).”

-예술이란 뭘까?

“시를 쓰고 싶은 욕구는 모두 타고 나는데, 어떤 이는 시인이 되고 어떤 이는 안 될 뿐이다. 미술도 본능이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하고 싶고, 나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그런데 예술가는 그 욕망이 너무 커서 그걸 펼치지 않고는 배겨 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어두운 식민시대에 배를 곯으면서까지 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을까가 늘 의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질문이 바보 같다는 걸 알았다. 어둡고 힘든데도 예술을 한 게 아니라, 어둡고 힘들기 때문에 예술을 한 거였다. 그거라도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서. 김환기가 말했다. 회화 예술이 없었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어떤 이에게 예술은 생존이다. 우리에게도 예술은 삶의 일부다.”

조선일보 인기 연재 '살롱 드 경성'을 책으로 엮은 김인혜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관이 2023년 8월 28일 오후 20년 몸 담아온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앞에서 활짝 웃었다. / 오종찬 기자

☞김인혜

1974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입사해 미술연구센터를 개설했으며, 근대미술팀장으로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 ‘유영국, 절대와 자유’전, ‘윤형근’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전 등을 기획했다.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에 ‘살롱 드 경성’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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