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 현장에 선 日청년들 “우리가 기억할 것”

도쿄/성호철 특파원 2023. 9. 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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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관동대지진 100년… 묻혀진 조선인 학살] [6·끝]
지난 2일 일본 도쿄 스미다구에 있는 아라카와 하천의 기네카와 다리 아래에서 일본 시민단체 ‘백년(百年)’ 소속 젊은이들이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목격한 일본인들의 증언을 낭독하고 있다. 이곳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현장이다. /성호철 특파원

2일 오후 2시 30분 일본 도쿄 변두리 스미다구에 있는 아라카와(荒川) 하천의 기네카와(木根川) 다리 아래 풀밭에 마련된 무대. 20·30대 일본인 젊은이 16명이 무대에 올라, 마이크 앞에서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을 목격한 일본인들의 증언을 낭독했다. “부모들과 아이들이 같이 줄지어 앉았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다”(사이타마현의 전 순사 아라이 겐지로) 같은 목격담을 읽는 일본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때때로 떨렸다. “여인을 죽였다”(도쿄도 에토구의 가메이도경찰서에서 일하던 나환산 증언)는 증언을 읽자, 참가자 600여 명 사이에서 ‘아…’ 하는 탄식이 터졌다.

100년 전인 1923년 9월,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 아라카와 하천의 제방에서 ‘관동대지진 100년 한국·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이 열렸다. 관동대지진은 관동(關東·간토) 일대를 덮친 규모 7.9의 큰 지진으로 10만5000명이 사망·실종한 일본 역대 최악의 재해였다. 당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믿은 일본인들이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했다.

학살 현장 중 한 곳인 아라카와 하천의 제방에서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鳳仙花·일본어로 ‘호센카’)가 이날 추도식을 개최했다. 봉선화는 1982년부터 매년 9월에 추도식을 열었다. 하지만 올해 행사는 70~80대에 접어든 봉선화의 오랜 회원이 아닌, 20~30대 젊은이들이 만든 ‘백년(百年)’이란 새 조직이 준비했다. 봉선화가 조선인 학살을 기리는 젊은이들을 한 명씩 찾아, ‘100년 추도 행사’를 부탁한 것이다. 이 추도식은 일본·한국·북한 등 어느 정부와도 무관한 순수 일본 시민 단체의 행사였다. 청년들의 모임 ‘백년’은 한자어(百年)를 일본어 발음인 ‘햐쿠넨’로 읽지 않고, 한국어를 그대로 따 ‘백년’이라고 발음한다.

“죽은이는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살해당한 당신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100년 전 이곳에 있었던 당신은 누구입니까. 내년에도 이곳에서 당신과 만나고 싶습니다.” 낭독회 사회자는 “지금 우리는 이곳에 있고, 당신도 확실히 이 장소에 있었다”고 말했다. ‘백년’ 측은 당시 희생자는 대부분 이름·본적을 알지 못하지만 기록에 5명이 남아있다며 박경득(당시 22세, 경기도)·김재근(44세, 전남)·조묘성(연령 불명, 제주도)·조정수(제주도)·조정하(제주도) 등 5명의 신원을 이날 밝혔다. ‘백년’ 멤버인 와타나베 슈씨는 “100년 전 과거를 현재로 이어가기 위한 활동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아사노 모에씨는 “죽이는 편에 서지 않는, 차별에 맞서는 (일본)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멤버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원자폭탄 피해는 버섯 구름과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조선인) 학살은 학교에서 배운 기억조차 없다”고 말했다.

이날 추도식엔 경상북도 출신의 희생자 남성규씨의 외손자 권재익(66)씨와 경상남도 출신 희생자 조근석씨 유족인 조광환(62)씨가 참석했다. 권씨는 “외할아버지가 관동대지진 때 희생당한 사실은 일본 정부도 아닌, 한국 정부도 아닌, 내가 직접 조선총독부 관리하에 만들어진 문서에서 찾아냈다”며 “‘다이쇼(일왕의 연호) 12년(1923년) 9월 5일 오후 9시 군마현 다야군 등강경찰서 사망’이라고 기록돼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족인 조씨는 “100주년이 끝이 아니다. 계속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추도식엔 20~30대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야마모토 유(34)씨는 “희생자는 나와 같은 동년배”라며 “미래에 같은 잘못을 하지 않으려면 젊은 우리들이 기억해야 한다. 앞으로 지인들에게 알리겠다”고 말했다. 야나가와 도모키(38)씨는 “가해에 가담한 일본의 책임을 모르는 체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추도식에 왔다”며 “관동대지진의 조선인학살은 100년 전 일이 아니라, 현재 사회에도 관통하는 사건이며, 지금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절대로 좋은 미래로 이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당초 주최 측은 120명 정도의 참석을 예상했다. 실제로는 5배나 많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모였다. 참혹한 증언 낭독이 끝난 기네카와 다리 아래는 인파로 가득 찼다. 이내 망자를 보내며 펼치는, 한국 특유의 축제 무대가 열렸다. 20여 명이 꽹과리와 장구를 치자 저고리를 입은 한 재일 한국인은 덩실 춤을 췄다. 600여 참석자들도 함께 어울렸다. 추도식이 열린 아라카와 하천 풀밭에서 도보로 3분 정도 떨어진 주택가에 있는 ‘조선인 학살 추모비’에는 이날 오후 내내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도(悼·슬퍼하다)’라고 쓰인 비석 앞에는 온갖 꽃들과 함께 참이슬·좋은데이·처음처럼·안동소주 같은 한국 소주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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