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136] 냄새가 오는 길목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3. 9. 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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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양진경

냄새가 오는 길목

무엇이든 냄새 맡기 좋았던 길목

다 왔으나 다 오진 않았던

길목에 들어설 때마다

그랬다. 언제고 한 집에서는

길과 맞닿은 부엌 창문으로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를

한 접시 가득 생선 굽는 냄새를

그랬다. 이 나라의 냄새가 아니게

뜨거운 열사(熱砂)의 냄새 퍼뜨려주었다

퇴근길 혼자 가는

자취 생활자의 광막한 공복을 후비곤 했다

(…) 늦여름, 풀이 마른다

이 나라의 냄새가 아니게 풀이 마른다

열사의 타는 물의 향이 넘어온다

쓰라린 가을 길목

-이진명(李珍明, 1955~ )

냄새가 ‘가는’ 길목이 아니라 ‘오는’ 길목. “다 왔으나 다 오진 않았던”이라는 표현도 절묘하다. 퇴근길에 지친 몸을 끌고 자취방을 향해 골목길을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 큰길을 지나 골목에 들어서면 내 집에 거의 다 왔다고 안심이 되었지만, 아직 다 오진 않았다. 길과 맞닿은 부엌 창문을 보기 힘든 동네에 나는 몇 년째 살고 있다.

냄새가 오는 길목은 사람 사는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길과 맞닿은 부엌 창문이 있고 그 창문이 열려 있어야, 편의점에서 파는 즉석요리가 아니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만들어야 냄새가 사방으로 번진다. 자신을 위해 혹은 가족을 위해, 친구를 위해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는 사람들.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우리 사회가 향기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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