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조선인 학살의 역사’를 계속 기록해야하는 이유
한국과 일본은 1965년 국교 정상화 이래로 비극의 과거사(史)를 둘러싼 갈등과 화해를 반복했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 총리는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다. 1998년엔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 2010년 간 나오토 전 총리가 재차 사죄했다. 식민지를 겪은 나라가 옛 지배국에서 세 차례나 포괄적인 공식 사죄를 받은 건 한국이 유일하다. 전쟁 침략이 아닌 식민지 지배를 사죄한 드문 사례로 국제사회도 높이 평가한다. 아울러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당시 한국 정부 예산보다 많은 5억달러를 유·무상으로 제공했다. 이 또한 이례적이었다고 평가된다.
포괄적인 사죄와 배상은 그러나 몇몇 개별 사안에 대해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00년 전 일어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이다. 한일 간 외교 쟁점이었던 종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노동자 문제와 달리, 조선인 학살은 한일 양국의 무관심 속에 정치적 쟁점도 되지 못한 채 외면받았다. 제대로 된 정부 차원의 조사도 없어 희생자가 몇 명인지조차 모른다. 사자(死者)의 이름도 모른다. 한국 정부는 일본 측에 이 문제를 압박하지 않아 왔고 일본 정부는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 사실관계를 파악할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입장만 반복한다.
6회짜리 기획 시리즈 ‘관동대지진 100년, 묻혀진 조선인 학살’을 취재하면서 “왜 그런 시리즈를 하느냐”는 반문을 많이 들었다. 일본인 지인 중엔 “설마 도쿄에서 그런 학살이 있었겠느냐”고 외면하는 이도 있었다. “떠들어 봤자, 아무것도 안 변한다”는 한국인도 적지 않았다. 이들의 무심한 반응을 보면서 앞으로 100년이 흐르고서 역사가들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일본 정부 입장을 정설로 받아들일까 두려웠다. 누군가는 계속 사실을 찾아내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