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나도 매미처럼

채길우 시인·제약회사 연구원 2023. 9. 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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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이었다. 나는 보통 전철을 탔다가 통근 버스로 갈아타 출근하는데, 이번 폭염엔 선로가 늘어져 열차가 연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전철이 불시에 늦어지면 환승역에서 통근 버스를 놓친다. 그러면 회사까지 도보로 40분 걸리는 길을 서둘러야 한다. 한눈팔면 지각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엔 길을 몰라 허둥대다 겨우 회사에 닿았는데, 연착이 반복되자 어떻게 움직이고 무슨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익숙해져 갔다. 걷다 보니 차창으로 반쯤은 졸거나 멍한 시선으로 지나치던 풍경과는 다른 일상을 접할 수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는 주민, 작은 유치원 가방을 멘 아이를 등원시키는 어머니들의 대화, 초등학생들이 장난스레 등교하는 모습, 아파트 단지의 교통 지도를 하는 수위 어르신께서 먼저 인사를 건네주시기도 하고, 길가엔 분홍 꽃을 터뜨린 배롱나무들, 노란 꽃을 가득 피워낸 모감주나무에 매달려 온밤을 뒤척이다 마침내 어른이 된 매미들의 허물을 손에 가득 줍기도 했다.

별것 아닌 일상 같아도 문득 나는 이 길 위에서 맑고 낯설고 외로워 기분이 좋았다. 매일의 지친 출근 버스 안이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아웅다웅 피곤한 눈치 싸움을 해야 하는 사무실보다도 아무런 기능 없는 지금의 내가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냥 여기 온종일 있고 싶었다. 길가 벤치에 앉아 휴대전화를 끄고 무거운 가방을 벗은 채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변두리에서 눈을 감자 시간이 멈춘 듯했다.

하지만 머리 위에서 매미들이 일제히 소리를 높여, 나는 화들짝 백일몽에서 깨어난다. 시계를 보니 지각 직전이고 나는 생각도 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매미 껍질들이 손아귀에서 바스러져 내리고 온몸은 땀으로 젖어간다. 되돌아온 현실로부터 어떤 후회와 불안이 여름 열기 속 찰나의 실바람처럼 등을 따라 흐르다 잊히고 나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이렇게 터질 듯 뛰다 보면 툭툭 차오르는 심장이 가슴의 껍질을 갈라 벗고 날개 단 새로운 나를 바깥으로 꺼내줄까? 나도 매미처럼 파란 하늘까지 올라 깊고 먼 울음 울 수 있을까? 무더운 여름인데. 이 여름도 그저 지나가 버릴 것만 같은데.

채길우 시인·제약회사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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